♧ 자서
목젖 아래 가라앉아 있는 말입니다
뱃속에서부터 터득한 말입니다
북받칠 때
겨를 없을 때
불쑥불쑥 솟구치는 말들을
팽팽한 가을 수평선 위로
몇 자 올려 놓습니다
♧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길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
꽃샘이 날밤을 새워도
어쩌지 못한 민오름 아래
이끼 깔고 낙엽은 덮고 한뎃잠을 자다가
느, 피면 나도 피고
느, 돋으면 나도 돋아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파르르르 바람꽃
♧ 구순의 입덧
콩잎에 쿠싱한 멜젓 싸서 여름 넘기겠다 시고
생선 굽던 손가락은 핥기만 해도 베지근하다 시고
보말은 먹는 맛보다 잡는 맛 까는 맛이라 시고
빙떡은 ᄉᆞᆯ강ᄉᆞᆯ강 삶은 무채 맛이라 시고
찬바람엔 ᄐᆞ랑ᄐᆞ랑한 메밀 청묵 생각난다 시고
눈 오면 시든 고구마 삶아 ᄆᆞ랑ᄆᆞ랑 먹고프다 시고
♧ 할아버지 판결문
수박서리 꼬맹이들 할아버지 부르셔
더러는 냅다 뛰고 쭈볏쭈볏 몇은 불려가
들을라 새가 들을라 이름은 덮어두고
손 잡히는 데 있는 이 아이는 야의
말 들리는 데 있는 저 아이는 쟈의
숨어서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가의
야의 쟈의 따고?
망은 가의가 보고?
허허 이 멩랑한 작당은
야의 쟈의 가의냐?
다시 또 들어오켕 ᄒᆞ민
일름 ᄃᆞᆯ아멩 놔두마
♧ 멍
가끔은 나에게서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올레 길에 놀멍 쉬멍 걸으멍
멍으로 다져진 땅에 발을 올려 놓는다
바다며 돌이며 바당이멍 돌이멍
숲이며 숲이멍 비오면 비 맞으멍
바람엔 ᄇᆞ름 맞으멍 바쁠 때는 일ᄒᆞ멍
다툴 땐 ᄃᆞ투멍 화 날 땐 용심내멍
기쁠 땐 지꺼지멍 말할 땐 말ᄀᆞ르멍
슬플 땐 눈물 흘치멍 가고 올 땐 가멍 오멍
산다 산다는 게 멍 드는 일이었네
부랴부랴 ᄃᆞ르멍 ᄃᆞ르멍 바쁨을 누렸네
검푸른 부종을 이젠 쓰다듬어야 하겠네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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