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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2)와 억새

by 김창집1 2023. 11. 12.

 

 

밤의 호수 성숙옥

 

 

둥근달을 띄운 호수의 밤

구름이 노을 저으니

달빛이 굽이친다

 

은하수에서 내리는 빛을 베고

내일을 꿈꾸는 나무들 물그림자

 

호수에 드는 물은 정든 사람 발소리 같고

고요한 그 물이 적막을 까는 밤

 

문득

오가는 계절 사이

기다리고 지워지는 것들이

물수제비를 뜨는데

 

물 고인 가슴에 그려지는 파문

 

 

 

 

상강 아침 우정연

 

 

산등성이 노란 小菊 꽃망울 맺혀갈 때

아침 이슬 꽃으로 맺혀갈 때

느린 걸음 산자락 따라 걸을 때

 

풀숲 사이에 작은 움직임이 있다

개옻나무 푸른 잎이 주홍으로 물드는 그늘 아래

갈색 실뱀 한 마리 있다

 

나는 그를 보고 움찔하고, 그는 나를 보고 화들짝 한다

 

갈등을 겪는 그윽한 사이

 

어느 한때, 그대가 이슬이었을 순간

나는 꽃이었으리

그대의 모습과 나의 모습

하나로 포개지던 때 있었으리

 

 

 

 

잔디 김정옥

 

 

엄마가 지팡이를 짚고 온다

 

겨울이 와도 눕지 않는다

눕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왕나발 소리로 밟지만

다시 일어서던 우리 엄마

 

아이들이 우당탕탕 밟고

지나가도

툭툭 털고 일어서던 우리 엄마

 

빛바랜 사진 같은 얼굴로도

겨울바람이 몰려와도

눕지 않는다

 

스러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일어서고 또 일어선다

 

 

 

 

자목련 꽃잎이 되어 - 배한조

 

 

겨울 산을 벗어나 거리를 유영하는 사람들

꽃분홍 진달래꽃으로 피더니, 오늘은 벚꽃이 되었다.

어느새 마지막 남은 자목련 꽃잎 하나가

가지 끝에서 떨어질까 말까,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슬아슬한 저울질을 하고 있다.

 

매화꽃이 스러져 가던 날 아버지는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세상사 겉치레는 다 벗어버리고

온몸에 새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명줄을 잡을까 놓을까

흐릿한 안개속의 나락으로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자목련 꽃잎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액은

가는 비닐관을 타고 저승사자처럼

소리 없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허물어져 가는 토담집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황태처럼 건조해지는 혀, 말라가는 의식,

애타게 그리는, 하소연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꿈결같이 지나치는 백의의 사람들은

물 한 방울의 자비도 바랄 수 없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차디찬 피부를 가졌다.

 

황태 입속에도

순한 바람과 속살처럼 따스한 봄비라도 내려준다면,

그 비에 토담집은 허물어져도

촉촉이 젖은 채 미소 띤 자목련 꽃비로 내려

고개 돌려 뒤돌아보지 않고

저 대지 어느 곳에 고요히 스며들 텐데.

 

 

 

 

온도와 사랑 손창기

 

 

온도가 높을수록 사랑은 더 빨리 식는다

 

끓어오르는 바닷물로

앨버트로스는 한숨 짓는다

해수면 상승으로 먹이가 부족해져

더 멀리 날아가야만 한다

 

여전히 사냥의 피와 심장의 물결은 붉은데,

수컷이 돌아오지 않을까 지레짐작해서

보이는 것이 없으면 더 지루해서

금세 암컷은 다른 수컷과 짝짓기 한다

 

몇 달도 안 되는 날에

며칠간의 믿음은 기후 따위는 생각지 않아

변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사랑도 기후의 영향을 받는 걸 몰라서

돌아갈 때까지 애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먹구름 낀 날

돌아온 수컷은 비처럼 떨어진다

슬픔을 닮은 피곤함이

날개 끝부터 점점 검어져 온다

 

지구의 기온이 오를수록

달빛과 별빛마저 상한 무정란처럼 터져 비릿하다

새들의 비행길도

사랑의 항법계기에도 금이 간다

 

 

                                        * 월간 우리11월호(통권 4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