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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3)

by 김창집1 2023. 11. 15.

 

 

목련이 필 무렵

 

 

이제 겨우 돌쟁이가 봄 서랍을 빼꼼 열어

 

가제 손수건 한 장 한 장 픽픽 집어던진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아가의 눈망울을 봐

 

 

 

 

유아불기幼兒不記

 

 

촐촐촐 비 내린다

쑥부쟁이 흔들린다

 

먼저 간 사람 달래기엔 이런 날이 참 좋아

눈물도 바람 탓이려니 가을비 탓이러니

43 난리통엔 별빛도 붉었을 텐데

수상한 그 시절을 만난 게 죄라면 죄고

행여나, 헛제사밥이라도 바란 적 없을 텐데

 

죽은 이는 원수였지만 산 자는 손잡아라

영모원 비석에 가닿지 못한 아이들 이름

 

죄 없는 것들이라서

여백이 창창하다

 

 

 

 

파계

 

 

누가 이끌었을까

아니, 등 떠밀었을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도로 아미타불 그 세월

 

절 아닌, 그리움 따라

오름에 와 핀

대흥란

 

 

 

 

가짜 창문을 열어요

 

 

어차피 갖지 못할 풍경이라 빌렸어요

 

자꾸만 비워내도 차오르는 맑은 허기

벽에다 창문을 붙이면 내일이 찾아올까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녀린 풀벌레 울음

당신 없는 슬픔이 내 안에 있겠지요

 

나를 또 속이기로 해요

속아 보기로 해요

 

 

 

 

배롱나무

 

 

그래서

석 달 열흘 붉은 적 있었다

 

봉분 너머 또 봉분 거느리는 배롱나무

 

벌초 날 시간차 공격

속수무책 당할 뿐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