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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의 시조(7)

by 김창집1 2023. 11. 14.

 

 

죽성골* 무연당憮然堂**

 

 

죽성골에 가보아라

시리게 외로울 때면

천천히 오솔길 따라 걷다 보면 만나리라

동산에 토담집 한 채

뒷짐 지고 있는 것을

 

마당인지 텃밭인지

차나무와 매화나무

향긋한 잎과 열매는 차와 술로 빚어지고

한 마리 흰 진돗개는 동반자요 벗이다

 

새 평 남짓한 토방엔 CDLP판이

주인 수염만큼이나 벽장에 꽂혀 있다

클래식

음악 사랑에

눈과 귀가 밝고 깊은

 

40여 년 한라산을 일삼아 오르내린

발자국 꽉꽉 채운 배낭을 짊어지고

능선을 오르내리는

펄펄 나는 길잡이다

 

고독하지 않느냐고

나의 물음 끝에

삭힌 지 오래됐다는 듯

웃음으로 대답할 때

텃새들 찌르르 짹짹

맞장구를 쳐주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계절에 순응하며 끌고 온 여정 위에

애마는

오토바이 하나

나침판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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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마을 옛 이름.

**진용진 씨의 토담집 이름.

 

 

 

 

길상사를 거닐다

 

 

  성북동 배밭골에 배꽃이 필 때면

  달가닥달가닥 달려오는 흰 당나귀 발굽소리에 함흥 땅 솟을대문이 열리고 내가 왔다버선발로 달려 나와 소맷자락 부여잡고 어서 오세요” “그래, 자야*는 잘 있는가?” 우수에 찬 눈빛에 방문이 저절로 열리고 잘 지냈소장미 향기에 취하듯 불같은 사랑도 잠깐이었나 만주로 떠나버린 임** 그 사랑 38선 녹슨 철조망에 걸린 억만 갈래 그리움이

홍매화 붉은 향기로 적묵당***을 씻고 있다

 

  법정法頂의 무소유와 해인海印의 뜻을 담은

  대원각**** 칠천여 평 자리 튼 길상사엔

  사랑의 나타샤를 부르듯 풍경소리 바람소리

 

  그의 시를 읽으면 쓸쓸한 적막寂寞

  시들지 않게 하는 생명의 원천수였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참 맑고 향기로웠다

 

  어떻게 이 큰 땅을 선뜻 내 놓았나요?

  ‘그까짓 천억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요

  함박눈 펄펄 내리는 날

  임 곁으로 떠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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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이 지어준 김영한(19161999)의 호. 기명:진향, 법명:길상화

** 백석(19121996)

*** 김영한이 세상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곳

**** 서울 3대 요정의 하나

*****김영한의 산문집 내 사랑 백석에서 차용

 

 

 

 

부종휴

 

 

한라산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관음사 등산로* 입구 돌 위에 앉아 있는

한산漢山**이 그 첫 번째라고

산비둘기 구구구

 

43으로 막아버린 철조망 그 사이로

유언장 집에 두고 한라산 드나들었지

배낭엔 사진기와 식물도감

쌀 한 줌이 전부였네

 

구린굴 탐라계곡 개미등 용진굴 지나

왕관능 돌계단 올라 백록담에 올라서서

한라산 손바닥에 놓고

만들어낸 등산길

 

365번 찾은 백록담 그 물빛 능선 따라

영실로 어리목으로 관음사 돈네코로

3백여 풀과 나무들

이름 달아 주었네

 

섬 곳곳 굴을 찾아 몇 년을 누빈 끝에

김녕초 꼬마탐험대 발견한 만장굴엔

수만 년 태고의 신비

해방***의 문 달았네

 

한라산 벗 삼아 반백 년 발자취가

사진과 도감으로 불 밝힌 자연유산

천만년 흐를지라도

눈을 뜨고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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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관음사 등반로를 한산길로 명명.

** 부종휴(夫宗休, 19261980)의 호. 제주도 세계자연유산 가치를 맑혀낸 선각자. 식물학자.

*** 해방 후 19461947

 

 

              *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한국 현대시인선048,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