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성골* 무연당憮然堂**
죽성골에 가보아라
시리게 외로울 때면
천천히 오솔길 따라 걷다 보면 만나리라
동산에 토담집 한 채
뒷짐 지고 있는 것을
마당인지 텃밭인지
차나무와 매화나무…
향긋한 잎과 열매는 차와 술로 빚어지고
한 마리 흰 진돗개는 동반자요 벗이다
새 평 남짓한 토방엔 CD와 LP판이
주인 수염만큼이나 벽장에 꽂혀 있다
클래식
음악 사랑에
눈과 귀가 밝고 깊은
40여 년 한라산을 일삼아 오르내린
발자국 꽉꽉 채운 배낭을 짊어지고
능선을 오르내리는
펄펄 나는 길잡이다
고독하지 않느냐고
나의 물음 끝에
삭힌 지 오래됐다는 듯
웃음으로 대답할 때
텃새들 찌르르 짹짹
맞장구를 쳐주는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남으면 남는 대로
계절에 순응하며 끌고 온 여정 위에
애마는
오토바이 하나
나침판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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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마을 옛 이름.
**진용진 씨의 토담집 이름.
♧ 길상사를 거닐다
성북동 배밭골에 배꽃이 필 때면
달가닥달가닥 달려오는 흰 당나귀 발굽소리에 함흥 땅 솟을대문이 열리고 ‘내가 왔다’ 버선발로 달려 나와 소맷자락 부여잡고 “어서 오세요” “그래, 자야*는 잘 있는가?” 우수에 찬 눈빛에 방문이 저절로 열리고 “잘 지냈소” 장미 향기에 취하듯 불같은 사랑도 잠깐이었나 만주로 떠나버린 임** 그 사랑 3․8선 녹슨 철조망에 걸린 억만 갈래 그리움이
홍매화 붉은 향기로 적묵당***을 씻고 있다
법정法頂의 무소유와 해인海印의 뜻을 담은
대원각**** 칠천여 평 자리 튼 길상사엔
사랑의 나타샤를 부르듯 풍경소리 바람소리
그의 시를 읽으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생명의 원천수였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참 맑고 향기로웠다
어떻게 이 큰 땅을 선뜻 내 놓았나요?
‘그까짓 천억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요’
함박눈 펄펄 내리는 날
임 곁으로 떠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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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이 지어준 김영한(1916~1999)의 호. 기명:진향, 법명:길상화
** 백석(1912~1996)
*** 김영한이 세상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곳
**** 서울 3대 요정의 하나
*****김영한의 산문집 「내 사랑 백석」에서 차용
♧ 부종휴
한라산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관음사 등산로* 입구 돌 위에 앉아 있는
한산漢山**이 그 첫 번째라고
산비둘기 구구구…
4․3으로 막아버린 철조망 그 사이로
유언장 집에 두고 한라산 드나들었지
배낭엔 사진기와 식물도감
쌀 한 줌이 전부였네
구린굴 탐라계곡 개미등 용진굴 지나
왕관능 돌계단 올라 백록담에 올라서서
한라산 손바닥에 놓고
만들어낸 등산길
365번 찾은 백록담 그 물빛 능선 따라
영실로 어리목으로 관음사 돈네코로
3백여 풀과 나무들
이름 달아 주었네
섬 곳곳 굴窟을 찾아 몇 년을 누빈 끝에
김녕초 꼬마탐험대 발견한 만장굴엔
수만 년 태고의 신비
해방***의 문 달았네
한라산 벗 삼아 반백 년 발자취가
사진과 도감으로 불 밝힌 자연유산
천만년 흐를지라도
눈을 뜨고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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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관음사 등반로를 한산길로 명명.
** 부종휴(夫宗休, 1926~1980)의 호. 제주도 세계자연유산 가치를 맑혀낸 선각자. 식물학자.
*** 해방 후 1946~1947년
* 오영호 시조집 『농막일기』(한국 현대시인선048,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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