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련이 필 무렵
이제 겨우 돌쟁이가 봄 서랍을 빼꼼 열어
가제 손수건 한 장 한 장 픽픽 집어던진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아가의 눈망울을 봐
♧ 유아불기幼兒不記
촐촐촐 비 내린다
쑥부쟁이 흔들린다
먼저 간 사람 달래기엔 이런 날이 참 좋아
눈물도 바람 탓이려니 가을비 탓이러니
4․3 난리통엔 별빛도 붉었을 텐데
수상한 그 시절을 만난 게 죄라면 죄고
행여나, 헛제사밥이라도 바란 적 없을 텐데
죽은 이는 원수였지만 산 자는 손잡아라
영모원 비석에 가닿지 못한 아이들 이름
죄 없는 것들이라서
여백이 창창하다
♧ 파계
누가 이끌었을까
아니, 등 떠밀었을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도로 아미타불 그 세월
절 아닌, 그리움 따라
오름에 와 핀
대흥란
♧ 가짜 창문을 열어요
어차피 갖지 못할 풍경이라 빌렸어요
자꾸만 비워내도 차오르는 맑은 허기
벽에다 창문을 붙이면 내일이 찾아올까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녀린 풀벌레 울음
당신 없는 슬픔이 내 안에 있겠지요
나를 또 속이기로 해요
속아 보기로 해요
♧ 배롱나무
그래서
석 달 열흘 붉은 적 있었다
봉분 너머 또 봉분 거느리는 배롱나무
벌초 날 시간차 공격
속수무책 당할 뿐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 (시인동네 시인선 21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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