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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5. 5. 3.

 

 

백설에 빠지다 - 정미화

 

 

설국열차를 탔다

끝이 어딘지 궁금하지 않게

모두를 공평하게 덮어 한없는 용서를 퍼 붓는다

 

차마 글자 하나 발자국도 조심스러워

차분함에 숨죽여 귀 기울여 본다

시린 눈에 담기는 풍광 신이 보내 준 선물일까

이렇게 조건 없이 받아도 되는 걸까

 

앙상한 가지를 포근히

무성한 청솔도 따뜻하게

알곡을 내어 준 빈 들판은 깨끗한 원고지

과분한 대접에 고마움을 써 내려 간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이렇게 백지로 받아 보았나

또 용서를 미련 없이 해 주었나

눈 속에 서 있는 것조차 부끄럽다

 

 


 

원유遠遊 - 정형무

 

 

눈뜨자마자 나를 보았다

천장에 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나처럼 나를 생각할까

한소리 지르려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 안팎에 있는 나에게

물속에서도 물 바깥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소리 내지 않았지만 들을 수 있었다

들렸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강산하해를 싸돌아다녀도

말 안 되는 말들이 웅얼웅얼 따라왔다

 

짖지 않는 개떼로부터 멀어지다

푸른 별을 박차고 나오자

마침내 눈 감기고 들리지 않았다

 

빛과 중력이 다투는 곳에서

태아처럼 웅크려 돌며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랫동안 떠올렸다

 

 


 

풍화 한상호

 

 

먹이느라 패이고

애태우다 함몰 중인

 

높고

푸르던

아내의 자존산自尊山

 

브래지어가 작아지고 있다

 

 


 

나무의 레퀴엠 권상진

 

 

죽은 나무가 있었다

그늘은 죽음을 따라나섰는지

목숨 있는 나무들만 휘휘 소리를 내며

몸을 흐느끼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를

애써 묻으려 하지 않았다

죽음이 스스로 몸을 누일 때까지

산 나무는 죽은 나무 곁에 서서

이후의 삶을 지켜 주었다

속으로만 차오르던 눈물이 멎자

나무는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삶의 무게는 눈물이 전부였지만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산 나무들은 만장 같은 잎을 흔들며

바람의 노래를 함께 불렸다

그런 날은

죽은 나무가 하나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비워진 그릇 김정식

 

 

국밥집에서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명함이 붙은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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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070 전화,

전화를 말고 국물을 꾹꾹 누르며

건더기에서 육질을 퍼 올렸다

식당 어디선가 연인의 가난한 그리움이

모닥불처럼 타닥타닥 피어오르며

김이 모락모락 났다

옹이 박힌 국그릇에 국물을 얹어 가며

지나간 생을 데워 보았다

구멍 난 작업복으로 찾아드는 냉기

아파트 고공의 밧줄은 오르내리고

밤하늘은 크레인의 기울기만큼 멀어져 갔다

인연의 푸념도

국그릇에 뿌려 보고

김치에 깍두기에 소금을 뿌리며

자유를 오도독오도독 씹어 보았다

멈추어진 시곗바늘,

넘기지 못한

책장과 책장 사이로

밀려오는 뜨거운 김이

비워진 그릇에 담기고 있었다

 

 


 

추자도를 지나며 여형연

 

 

절명이란 목숨이 끊어질 때,

그 침묵까지 끊어진

울음을 말한다

 

추자도 앞에는 절명여絶命汝라는

바위섬이 있다

 

내가 밤새 아메리카노를

치사량으로 마시고

뜬눈으로 새벽이 되었을 때

한번은 잔인하게

헤어지고 싶었다

 

확실히 이별은 통증이다

온통 흔들리는 삶이었지만

나를 바닥까지 흔들어

등대처럼 바다를 더듬는

검은 불빛

사실 나는 추자도엘 가 본 적이 없다

 

불을 끈 가설극장의

쓸쓸한 배경,

옷을 벗은 여자의 뒷모습

그런 지나치는 삶이 좋았다

죽은 낚시꾼들은 절명여에서

낚싯대를 던졌다

 

나는 목숨을 던지고 낚는

바람을 모른다

비명 같은 흔들림을 삼키는

바다를 모른다

 

낚싯배가 추자도를

지나고 있다

나도 지나갈 것이다

절명처럼.

 

 

                      *월간 우리20254월호(통권 제44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