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긴 무덤
골로 간단 그 말뜻 이제야 알겠네
농담처럼 건넸던 말 등골이 오싹한 말 비명도 안 들리는 심심산천 골짜기 에 시작도 끝도 모를 깊고 긴 구덩이, 관이 되고 무덤이 된 산내면 골령골, 등 밟고 뒤통수에 총구를 들이대는, 두 다리를 들어 올려 구덩이로 구겨 넣는, 엎드린 채 돌아보는 마지막 눈빛들, 확인사살 총성 담긴 열여덟 장 사진들
반세기 지난 후에야 긴 시간의 문을 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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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대전시 산내면 골령골에서 7,000여 명의 민간인
이 학살되었다.

♧ 남바람꽃
안부를 묻는 것도 불안불안 했었지
해안선 5킬로 이내로 하산하란 그 명령 바들바들 떨렸지 거처할 곳 없었지 세 차례 개명으로 난세를 타고 넘었지 바람의 땅에선 바람처럼 살아야 해 한라 산바람 남방바람 아냐 그냥 남바람이라 할 거야
사월의 중산간 들녘
소곤소곤 바람 분다

♧ 봉근 둥이*
동네에서 하나둘 남자들이 사라졌다
할아버지
아버지
큰형
작은형
어머니 혼자인데도
동생은
태
어
났
다
뒷집에도 아이울음 조심조심 흘렀다
딸만 있던 그 집에
고추 달고 나온 아이
기쁜 날 그 집에서는
곡소리가
흘
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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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온 아이라는 뜻으로 배우자가 아닌 관계에서 난 자식을 이르는 제주어

♧ 조천朝天
간절한
촛불 하나
지키고 싶던
스무 살
거꾸로 매달려
찢어놓던 하늘가에
꼿꼿한 가문의 핏줄
하르방손지* 있었다
떠도는 바람 따라
의문사**로 돌아온
시간의 근황을
꼼꼼히 더듬으며
거스른 세월을 풀고
밝아오는
아침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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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는 뜻으로 김용철의 할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이다.
** 1948년 3월, 조천지서 김용철 고문치사사건

♧ 돌매화
눈부신 고독이라야 찬란히 빛이 나죠
절벽 끝 바위틈에 외발로 선다 해도
순백의 향기를 품고
피어나는 사랑처럼
흔들리지 않으려고 자꾸 키를 낮췄어요
해맑고 투명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
혼자서 걸어왔죠
하늘이 내어준 그만큼의 자리에서
서둘러 이별을 준비해야 한다면
마지막 인사말쯤은 바람에게 맡겨요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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