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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11)

by 김창집1 2025. 5. 4.

 

 

옛집 2

 

 

안채, 바깥채로 이루어진 우리 집

지붕에는 약한 바람과 잔잔한 햇빛이

언제나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집 앞 바닷가에는

온종일 물고기와 해초가 나누던

토막 난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았다

 

사람들이 길게 토해내는 한숨과

메마른 눈물이 여러 차례

물결에 밀려갔다가 밀려왔고

몸을 곧추세우며 귀 기울여 들은

그때의 사건과 사람은 오랫동안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백여 년 동안, 멀구슬나무가

집 어귀에 서서 겪은 사연이

항아리에 그대로 담겨 있었고

집 뒤뜰에 우거진 대나무 숲에는

사시사철 푸른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냄새를 맡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정말, 바람은 정말 향기롭기만 할 것인가

 

 


 

풍선 비망록*

 

 

손에 잡은 풍선을 바다에 던지면

바다는 곧 붉은 파도로 변했다

구멍 난 풍선에는 붉은색 염료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뒤부터 우리 가족은

바다에 던져진 풍선과 다르지 않았다

씨 말리겠다는 서청단원의 말에 어머니는

보름씩, 한 달씩 나를 낯선 집에 맡겼다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숨진 어머니로부터

겨우 찾은 증거는 금니와 삼베옷뿐이었다

듣기 싫은 말도 분명 있었을 테지만,

홍역 후유증으로 평생 난청에 시달렸다

바다에 던져진 풍선의 위력은 내가

건설업계로 뛰어든 뒤에도 발휘되었다

청년회의소 자매클럽을 방문하기 위해

회원들과 홍콩에 가게 되었을 때,

행정당국은 나의 여권발급을 거부했다

동행하는 사람들의 신원보증으로 결국

홍콩까지 겨우 갈 수는 있었지만,

바다에 던져진 풍선과 다름이 없었다

방문 밑으로 스며든 종이 때문이었다

거기엔, 이곳에서 만난 사람을 모두

기록해서 제출하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학교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던 우리 아들은

공무원도, 법관도 아예 포기해야 했다

사람들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손뼉 치며

대한민국을 크게, 힘차게 외질 때마다

내 눈의 망막에 끊임없이 어른거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여러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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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과 평화(vol 49, 2022, 겨울)에 실린 임충구 님의 경험을 토대로 삼았다.

 

 


 

이른 휴일 아침

 

 

이른 휴일 아침, 동화 속의 기차를

끌고 온 바람에 기대어

오름의 정상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누워 있는 지붕들 사이로

회색 연기가 흩날리고

수면에 젖었던 바다가 갑자기

파르르 물결을 일으킨다

나뭇가지들 틈에서 오랫동안 기생하는

옛날 기억들이 내 앞을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이 멈추고 나서야 햇빛은

수채화를 닮은 하늘과 한데 섞여

익숙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이제는 사람도, 새들도 또렷이 잘 보인다

 

 


 

열망

 

 

  지휘자가 지휘봉을 잠시 멈춘 사이에 악보의 음들이 빠져나갔다 지휘가 끝나자 청중의 파도 같은 박수소리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박수소리는 연주회장의 천장을 휘돌다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수많은 청중이 일어서서 나이 든 지휘자를 향해 경의를 표했지만, 그것도 지휘자의 얼굴을 밝게 하지는 못했다

  가을날 오후, 공원 벤치에 앉은 지휘자는 오래전에 자신이 처음으로 지휘했던 곡의 맨 처음 부분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가족의 단란한 삶이 들어 있었다 지휘자는 또한 그의 부모가 가급적 아름다운 풍경만을 보여주려고 애쓰던 것을 기억해냈다

  지휘자는 어떤 부모가 귀여운 두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장면임을 깨달았다 그 뒤부터, 지휘자의 꿈에는 단란했던 가족의 얼굴이 자주 등장했다 지휘자는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지울 수 없었다

 

 


 

낙가산, 독경소리

 

 

요즈음 중생들이 제멋대로

겁을 겁으로 여기지 않고

겁을 겁이라 부르지 않아도

 

강화 보문사마애석불좌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흔들림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다

 

눈썹바위가 아무리 기다랗게

검은 장막을 드리운다 해도

비틀린 중생 바로잡는 뜻을

가로막을 수는 결코 없으리라

 

비 오는 일요일 한낮에도

낙가산 끝까지 멀리 퍼지는

스님의 청정한 독경소리는

탁한 세속의 벽으로 스며든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