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쉬
‘쉬’ 소리와 수신호 모두가 입틀막 한 밤
얼어붙은 개울물 복화술로 흐르고
들풀은 동토를 뚫어
적막을 깨뜨린다
‘쉬’라는 단음절 등골을 빠져나가고
새봄이 온단 소문에 깨금발을 해봐도
봉인된 자음접변에
모국어가 혀를 잃었다
굶주린 살쾡이처럼 ‘쉬쉬’ 하며 다가와
삼시에 꽃밭을 헤집는 돌개바람
침묵은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식량이다

♧ 후천성 시작詩作 결핍증
1. 진료실
문진과 청진으로 정밀 검진 시작되고
시인이란 이름엔 명예훼손 초기증상
혈액 속 시어 수치도 정상범위 아래다
CT 상엔 모음 지음 시다공증詩多孔症 진행 중
직무유기 진단은 오진이길 바랐는데
후천성 시작 결핍증, 현대인의 병이란다
2. 약국
하루에 한번 먹는 비유 함축 상징이란 약
부작용은 불면과 고뇌, 완치 사례 드물지만
티 나게 호전은 되니 거르지 말란 주의 사항
시단에 들어온 이상 빠져나갈 생각 말고
이 약을 죽는 날까지 지며리 먹다 보면
언젠가 “몸속의 피가 시에 싹 감염됩니다”

♧ 왜? 해가 안 뜬대?
“요즘은 정동진도 장사가 안 된다며?”
아내에게 말하니 “왜? 해가 안 뜬대?” 한다. 기가 막혀 “아니 뭐라고? 해가 안 뜨긴 왜 안 떠? 해야 매일 뜨지!” 했더니…… 호호호
아내가 빨래를 개며 해처럼 웃고 있다

♧ 임시 보관함
그만 쓰고 보낼까 말까 망설인 몇 날 며칠
서두가 눈에 밟혀 몇 발짝 가다 말고
조사를 고치다가도 술어가 또 걸린다
매일매일 쌓이는 이메일 디지털 숲
스팸 메일 광고 메일 불청객들 판쳐도
도저히 보낼 수 없다 이대론 너만 아파
넌 내게 쉽사리 장문으로 넘어와도
난 네 게 단 한 줄로도 가닿지 못하네
밤새워 뒤척인 문장들 오늘도 임시 보관중

♧ 시인의 주거 형태
시를
읽으면서
낯선 걸 끌어안고
시를
쓰면서
익숙한 걸 버리며
시인은
시를 담보로
시집에 세 들어 산다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가히, 2025)에서
*사진 : 요즘 막 피어나는 쪽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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