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살나무 – 김순남
하늘을 항해 하는 교목들을
따라가지 않기로 했었지
흉내는 자신을 심문하는 채찍일 뿐
관목이 교목이 될 수 없다는 걸
린네가 일러주었다네
더러, 봄날이 데려오는
바람과 햇살 몇 모금이
방실방실 꽃을 피우고
다다를 수 없는 높이에서
하늘이 반쯤 열리는 계절에
보랏빛 광채를 게우는
너
처연히 맞서지 않고
처절하게 싸우지 않아도
맞닥뜨리는 삶이
가슴 환하게 비추는 열매가
조랑조랑 열리고
실패와 두려움이
힘겹게 살아온 내가
어렵게 버텨온 네게 건네는
우산이었음을
늦게 깨닫는 것일 뿐이네

♧ 모슬포의 테두리 – 김병심
나는 여기 있고 당신은 떠난
비밀을 아는 사이는 우리 밖에 없다
매를 맞아온 당신은 손을 내민 사람들 가까이 가지 않았다 손등이 당신을 쥐고 있었지만 손금이 깨어져 길이 막히고 당신을 멀리 팽개치고 있었다 고이는 곳에서 발톱마저 빠져버린 당신은 빈틈으로도 커지는 등이 가려워 내 손을 잡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물건을 텅 빈 눈으로 보고 창가에 기대서고
창밖에 두고 온 당신은 내 눈에 텅 빈 몸만 가득 차 있고
손을 대지 않고도 마음을 가지는 당신에게 나는 싱싱한 피와 살을 그러모았다
화색이 돌아온 나는 멀리서도 인사를 건네고
깨진 유리를 쓸고 창을 갈아 끼우는 햇살처럼 기억은 나만 붙들고 사는 것 같을 때마다 틈이 벌어지던 우리라는 관계 잘못 배달된 상자를 뜯고 나서 주인이 올 때까지 구석에 놓고 요즘도 쌀포대가 상자에 담겨오는지 내가 주문한 튀밥은 오지 않고 다른 물건만 배달된다
당신은 이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창문에 써 놓은 문장은 성가신 당신과 제법 어울렸다
끼니를 때워도 헛배만 부른 튀밥처럼 반려 울음도 가벼워지지 않아 마지막 손톱까지 다 뜯어먹은 손등 텅 빈 손을 놓자 하나였던 우리가 둘이 되었다 창밖으로 잠시 노을이 꽃피운 하늘 한가운데 있고 손은 너무 꽉 쥐면 주먹이 되었다
손은 펴기도 하고 둥근 여백을 감싸기도 해야 손금이 뻗는다고

♧ 가면 – 김병택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조차
호주머니 속에 감추고 다니던 것을
아무런 미련 없이 하나 둘 꺼내놓거나
녹슨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 되었다
흘러간 날들의 평범한 일상에 대해선
더 이상 기억하고 싶은 게 정말 없다
다만, 지나온 세월의 특별한 흔적은
어디에든 기록해 둘 만한 가치가 있으리
마음의 심지에 불을 붙인 시기는 아마
슬레이트 지붕 위에 무시로 떨어지는
쉰 내 나는 소음의 조각들만 보아도
넌더리나던 그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당장 큰 효과를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대면 기회를 갑절로 늘려, 자주 생활의
부면들을 환기하는 가면과 만났다
기거하는 공간에서도 노트를 열거나
이전보다 탐구 시간을 더 많이 늘려
끊임없이 바뀌는 가면의 빗장을 풀었다
풀리지 않는 사건과 마주치면서부터는
직접 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더라도
가면 쪽에다 우선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할 때마다, 가면은
진지한 얼굴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 죽기 전에 한잔 – 김수열
어, 어디야, 얼룽 와, 죽기 전에, 우리, 한산해야지
한잔도 없이, 한잔을 해버린,
숨 막히는 숨을 끝으로 숨을 뚝, 끊어버린,
엄지와 검지 중지로 잔을 들고, 내게 한산해, 웃음으로 말을 거는
저장된 사진을 보고, 나는 어지간히 놀라, 어라, 이게 말이 돼?
하마터면 형, 하고 부를 뻔했다
형은, 그렇지 형은
한잔을 위하여, 잔을 들고 빙긋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죽기 바로 전까지,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죽기 전에 한잔, 언약을 무람하게 무너뜨려놓고
형의 영정 앞에 앉아서는 한산할 수 없다는 댓거리로
마냥 삐져 문상 대신 핸드폰 들고 혼술을 했던 것인데
나만 몰랐구나, 실은 우리 죽기 전에
이미 한잔을 했구나, 그것도 엄청 찐하게
그래서 형은 그렇게 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구나,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형이구나
어, 형, 잘 가, 죽기 전에 한산했으니
다시 만나 한잔해

♧ 강설기를 지나며 – 김대용
1
질기게 스크럼 짠 파도 연이어 밀려오고
하늘 덮던 은빛 갈매기들이 모래밭에 줄지어 서 있다
밤새 일정하게 파도는 출렁거리고 노래하던
그들이 머리 위로 눈송이가 쌓였다.
2
무엇을 기다리는지 침묵을 삼키며 밤을 새운
어제의 아침이 다시 일어선다.
알루미늄 거적 쓰고 앉아있던
수많은 눈사람들이 훌훌 털고
바다로 나서는 눈보라를 만난다.
3
가로수는 어제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숲에 숨어 있던 새들이 하나 둘 날개를 풀었다.
철조망으로 가린 그 숲에 새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4
읽는 시간보다 보는 시간이 많아져
연출된 눈치가 보이면 채널을 돌리고
다큐멘터리 이외에는 울리지 않던 가슴이 쓰리다.
점점 눈물은 눈치 없다. 저들 눈사람들에게
손편지로 ‘사랑하고 존경 한다’라고
쓴 엽서 보낸다.
5
나의 엽서 시대에는 모진 놈들 그럭저럭
외면으로 반항하던 가면의 세상이었다.
상식으로 살기가 그리 어려울까?
마음 곧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
있거나 없거나 살아있는 모두 위대한 것
생명이므로 존귀한 것
6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 땅에 태어나
이 땅의 사는 방법대로 뿌린 대로 거두는 순리
이 땅에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평화
생각하다 보니 존재하지도 못하는 사랑
날 선 생각 잃어버린 자비
쓸 때 없이 소모해버린 것들 미안하다
그리고 침묵했었다 나는 비겁했다.
*계간 『제주작가』 2025년 봄호(통권 제8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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