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간의 바퀴
어제까지 웅장했던 내 앞의 산이
다른 날보다 나지막하게 보였다
곳곳에 아무렇게나 모여 있던 구름이
놀란 듯 빠른 속도로 흐트러졌다
오래된 꿈들이 날아다녔고
언제나 후줄근한 모습의 건물 옆
전신주에서는 마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집구석의 미물들이 허둥거리자
오후의 그림자가 크게 요동쳤다
공중의 열기구 터지던 날
아침에 친구가 돌변했을 때는
소나무 잎들이 세게 물결쳤다
해마다 어김없이 나타났다
시간의 바퀴를 돌려야 할 일이

♧ 우울한 확인
어느 날, 평소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가로 40센티, 세로 30센티 널판으로
둘러싸인 납골당의 공간으로 옮겨진다
좁디좁은 세상으로 스며드는 능력은
아무리 좌우를 살피며 애를 써도
절대자에게는 결코 미치지 못하므로
결국은 타인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오늘따라 센 바람은 불지 않고
서늘한 공기만 떠돌고 있을 뿐
정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툼하고 탁한 항아리의 주인공은
이곳에 온 다음 날부터 내 꿈에 나타나
허리 굽힌 자세로 허공을 바라보며
후회하는 언사를 잠시도 멈출 줄 몰랐다
살아 있을 때의 모든 약속은 헛된 말의
지장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밝히면서

♧ 공동묘지에서
새로 조성된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이제는 삶이 정지된 사람들을 만난다
살아 있을 때 단단했던 육신이
그사이에 작은 영혼으로 바뀌어
소을 흔드는 모습이 저쪽에 보인다
어렵고 막막한 간난의 생生을
한자리에서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이곳까지 떠밀려 온 것이리라
나뭇가지의 서늘한 움직임과
늙은 새들의 슬픈 낙하는
부질없는 세월 탓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어두운 눈으로 바라본다
육신을 무너뜨리는 시간을 꿈꾸듯
공통묘지로 향하고 있는 실루엣들을

♧ 먼 곳에 있는 원천을 향해
온통 부질없는 것임을 알지 못한 채
멀리 사라지는 것들을 아쉬워했다
거친 바다를 오래 헤엄치다 돌아와
열리지 않는 문의 돌쩌귀를 쪼는 심정으로
지붕을 바라보았다
헛된 일과에 쫓기는 육신은 자주
지붕의 햇살처럼 여기저기서
흐느적거릴 때가 많았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다다른 이곳의
마지막 건물 모서리에 서서 확인한 것은
고작 몇 그램의 에너지였다
안개 낀 날 오름을 오르내리며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일상의 한가운데에도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온종일 넘쳐나는 의식과 바람에 흔들렸다
움직임이야말로
나를 지탱하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므로
오늘도 나는
먼 곳에 있는 원천을 향해 걸어간다

♧ 심판의 손바닥
1980년대 초였다 서울 판자촌 동네의 중년 남자 대여섯 명은,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이 골목 중간에 있는 통장 집 거실에 모이곤 했다 AFKN에서 중계하는 WWF 프로레슬링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처음에 거인 선수들이 서로를 붙잡고 맹렬하게 싸우는 장면을 보는 데에 크게 재미를 들였고, 나중에는 선수들에 비해 왜소한 심판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세게 두드리며 ‘원! 투! 쓰리!’를 외치는 모습에 큰 관심을 쏟았다
심판의 손바닥은 승리를 확정 짓는 신호인 동시에, 패배의 거부를 널리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모든 제도와 가치가 손바닥 뒤집듯 자주 바뀌는 현실을 인내하고 있는 그들이, 바닥을 세게 두드리는 심판의 손바닥에 암울한 현실이 겹쳐지는 순간을 지나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 (황금알,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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