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이 오면 - 김승립
- 4․3 파르티잔
그해
겨울 하늬바람
사나운 눈보라 뚫고
산에 오른 사람들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그리움도 접고
아랫목 따순 사랑 기약으로만 남겨두고
봄이 하루빨리 오길 비념하며
곱은 손 비비며 싸우다
끝내 한라산 시꺼먼 골짜기에 묻혀
언 땅 밑 붉은 피로 흐르더니
산자락마다 붉게 붉게 꽃으로 피 어나
스스로 봄이 된 사람들
해마다 봄이 오면
먼 산 들녘에
진달래 산철쭉으로
피어나는
사람들

♧ 안곤을 – 김순선
안곤을 향해 건천을 건넌다
물은 언제 들어왔다 나갔는지
작은 웅덩이마다
게들이 죽어 둥둥 떠 있다
하안 배를 드러내고
팔다리가 하나둘 떨어져 나간 채
커다란 말없음표로
지옥 같은 땡볕 아래
빨갛게 익어버린 등딱지를 내보이며
시위하듯
죽음을 하늘에 알리고 있다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죽음을 바라보는
납작 엎드린 바다도
먼발치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 조짐 – 김연
만약에,
없는 발자국 가늠하는 그 말이 꾹꾹 가슴에 찍힌다는 건 시절이 머문 곳 어디인지 알아버린 탓이지 달을 핑계로 뱉어낸 뚝뚝 끊긴 시간 해 뜨면 찾아와 무심하게 콕콕 짓궂게 찌를 테지 마른 가지 털어내는 잔 빛 속에 행불된 시간이 서성인다면 곧,
꽃도 잎도 없이 삼켜버린 시절
울컥 토해내야 될 거야
성큼 봄, 오고 있구나
선한 폭군처럼

♧ 홍시 – 김원욱
성긴 하늘가
빈 가지에 매달려 바동거리는
고것도 먹이라고
어디선가 날아온 까막까치
비루한 초상을 쪼아 먹는다
나는 이승의 변방에서
내장이 다 드러난 채 피를 흘리고
몽환인 듯
폭설에 젖어 가뭇없이 떠돌다가 문득
실눈 뜨고 바라보니
도처에 흩어진 부스러기
설램은 거품 같아서
변혁의 하늘에 흐르는 적의 같아서
암울한 시계(視界) 저편
저벅저벅 걸어오는 고운 할미니
굿판 깊이 묻힌 흔적 같아서
불온한 시대
투명 눈발에 떠밀려온 화신처럼
시원의 들녘에서 목 놓아 부르짖던
또렷한 기억 하나

♧ 초록과 휘파람새를 위하여 – 김양회
선잠에 뒤척이다 작은 원룸의 창문을 열었을 때
초대형 월이 돌아가듯 윙윙거리는 울림에 화들짝 움츠려들었다
놀라긴, 도시가 새벽을 굴리는 소리야 습관 같은 거야,
서울살이 첫날 아침 중얼거린 말의 씨가 습관처럼 자라서
소리를 입 안에 쑤셔 넣어 삼켜도 또 다른 습관들이 자꾸만 자라난다
이제는 제발 창문을 여는 습관이 자라게 해 줘,
중얼거릴수록 유리창은 뿌옇게 구겨진 표정으로 일상마저 바꿔버린다
외출 시 KF94마스크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며칠째 중계되는 경보뉴스의 배경화면은 초미세먼지 휘날리는 시청 앞
불안과 공포의 군집들은 길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케인 몸집으로 순식간에 도시를 덮쳐버린다
황사의 골목은 이미 사막의 늙은 낙타처럼 주저앉아 쿨럭거린다
우후죽순 일어선 모래의 기둥들이 부서져 내리는 흐릿한 창 밖 풍경
문 밖을 나설 수가 없다
모래의 여자*가 되기 싫어,
초록이 필요해 초록을 모아야 해
눈의 여왕처럼 손닿으면 흰 눈이 아니라 초록이 되는 손가락을 갖고 싶어
어제의 봄 햇살과 내일의 여름 햇살을 뭉쳐서 초록을 만들 거야
봄의 초록과 여름의 초록은 다르니까
울울 창창 두 개의 초록빛 숲을 만들 거야 휘파람새를 위한 숲이야
봄날의 휘파람새와 여름날의 휘파람새 소리는 다르니까
모래의 여자가 초록을 만질 수 있었다면,
망태기에 모래 대신 초록을 담았을 거야
사구에 갇혀 있어도 초록을 뭉쳐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었을 거야
휘파람새가 날아왔겠지 휘리릭 휘리릭 휘파람 소리가 숲을 가득 채웠겠지
그랬겠지
그런데 초록을 어디에서 모으나?
엄마, 오늘 제주 내려가요 공항엔 나오지 마세요 버스타고
중산간 숲길을 돌아 느리게 가 보려구요 느리게,
---
*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
*계간 『제주작가』 2025 봄호(통권제8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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