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춘설 – 배한조
봄비가 내리는 아침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때
그녀를 배웅하러 나선 산길은
여기저기 눈이 온 듯 하얗다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기에
떨어진 꽃잎 하나가
하안 운동화에 붙어 왔네
보내기 아쉬운 마음
그녀는 어찌 알고,
주저주저
길 떠나지 못하였나 보다

♧ 장날 – 김석규
장토막을 기다린 사람들 아침부터 부산하다
생필품 잡화건 앞에 줄 길게 늘어서 있고
바지게 가득 참외 수박 한 짐 받쳐 놓거나
광주리에 담긴 병아리 오리 강아지 토끼 새끼
아침 이슬 그대로인 싱싱한 푸성귀며
돋보기에 갓을 쓴 잉어수염의 부채 장수도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이야기책들
그 한 켠 차일 그늘 아래선 국수를 말아 팔고
배꼽도 다 내놓은 아이 아까부터 칭얼대며
어머니 치마꼬리 늘어지게 잡고 따라다니는.

♧ 어머니의 길 – 황현중
신작로가 처음 나고 버스가 터덜털털
고샅길로 처음 들어오던 날 놀란 어머니가
원 난리다냐, 그러셨지요
여간 읍내 나갈 일 없는
어머니가 울컹덜컹 버스 타고
짜장면 한 사발 어찌어찌 잡수시고 오셔서는
세상 다 뒤집어졌구나, 그러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호멩이로 기어가는 밭두럭 길이었는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기역기역 기어가는 논두럭 길이었는데
앞산 뒷산 두 동강 내고 으르렁 달겨드는
호랭이 물어 갈 신작로라니
당최 이게 뭔 일이다냐, 내동 고개를 내저으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모시 적삼에 짚신 삼아 신고
십 리도 못 가는 아리랑 눈물길이었는데
주린 배를 독새기풀로 연명하며
윤사월 해는 길어 눈물범벅 보릿고개 길이었는데
젊은것들 나 몰라라 대처로 다 내빼고
청바지 나팔바지 뾰족구두 입고 신고
공돌이 공순이 되어 돌아오는
호랭이 물어 갈 신작로라니
세상 다 망해 가는구나, 그러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다래며 머루며 붉은 멍석딸기 한 알
입안에 쏘옥 넣어 주던 오솔길이었는데
시집간 누님 석삼년 만에 친정 나들이 때
물에 젖을까 살포시 치마 들고
볼 발그레 건너던 징검다리 길이었는데
고된 시집살이 내색도 못하고
남몰래 눈물 훔치던 장독대 밑 씀바귀
씀벅울먹 뒤안길이었는데
대처로 나가 영 소식 없는 큰 자식
행여 오늘 올까 내일은 올까, 목 빼고 내다보는
썩을 놈의 신작로라니
할 말 잃고 그만, 입 다물고 말았지요
박복한 손금으로 울며 닦은 어머니의 길,
빗물로 머리 감고 은비녀로 쪽 짓고
달아 달아 보름달아,
정화수 앞에 두 손 모으며 밤새 울며 빌던
이제는 없는
이제는 없는 나의 어머니,
조선 어머니의 가르맛길

♧ 눈과 바람 - 정지원
눈이 내린다,
하안 입김 스며드는 순간들,
벌거벗은 나뭇가지 우듬지에
차곡차곡 쌓이고
내 손길로 쓸어내리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흘러가는 기억,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늙고 어설픈 꿈들
그 뒤를 따르며,
불쑥둘쑥한 벼 그루터기 위에
조용히 쌓이고,
바람은 다져 넣는다,
시간의 흔적을.
눈이 새를 타고 날아간다,
힘없이 흩어지는 그들,
논둑 들풀을 덮어 간다
이 순간의 흔적,
잊은 속삭임처럼
끝없이 스쳐간다
또 다른 바람이 지나간다,
늙고 어설픈 꿈도 따르며,
하안 세계가 덮인 이곳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
그러나 여전히 남아
내 마음속에
소리 없이 스며든다.

♧ 모녀의 꿈 - 장문석
분홍 원피스의 앳된 소녀가 무대에 올랐다
네 발 보행기를 조심조심
넘어질세라 엄마가 옆에서 잡아주고 부축했다
마이크 앞에 이르자 엄마는 재빨리 딸 뒤로 숨어
두 무릎 꿇고는 혹시나 딸을 떠받쳤다
장애인의 날 노래자랑 무대에서였다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나에겐 꿈이 있어요,
불려야 할 노래가 있어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는 거였다
그게 꿈이라는 거였다
엄마는 대견하다는 듯
그 꿈이 곧 엄마의 꿈이 아니겠냐며
환한 미소로 손장단을 쳤다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나는 천사의 존재를 믿어요
보는 것마다 원가 좋은 게 있어요
뒤돌아보는 딸의 눈물과
올려다보는 엄마의 눈물이
반짝, 마주 빛났다
순간, 보행기를 놓친 딸이
비틀, 했다 엄마가 황급히
딸의 다리를 껴안았다
l'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강을 건널 거예요
나에겐 꿈이 있어요
관객들은 시나브로 물소리에 젖기 시작했다
찰방찰방, 낮지만 결코 끊일 수 없는……
모녀는 이미 강을 건너고 있었다
막이 내렸는데도 조명이 꺼졌는데도
오래도록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스웨덴 출신 혼성 그룹 ABBA의 노래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 제443)에서
* 사진 : 제주시 우도에서(2025.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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