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1)

by 김창집1 2025. 5. 20.

 

 

춘설 배한조

 

 

봄비가 내리는 아침

이제는 떠나보내야 할 때

그녀를 배웅하러 나선 산길은

여기저기 눈이 온 듯 하얗다

 

어디서 나와 어디로 가는 길이기에

떨어진 꽃잎 하나가

하안 운동화에 붙어 왔네

 

보내기 아쉬운 마음

그녀는 어찌 알고,

주저주저

길 떠나지 못하였나 보다

 

 


 

장날 김석규

 

 

장토막을 기다린 사람들 아침부터 부산하다

생필품 잡화건 앞에 줄 길게 늘어서 있고

바지게 가득 참외 수박 한 짐 받쳐 놓거나

광주리에 담긴 병아리 오리 강아지 토끼 새끼

아침 이슬 그대로인 싱싱한 푸성귀며

돋보기에 갓을 쓴 잉어수염의 부채 장수도

심청전 홍길동전 춘향전 장화홍련전 이야기책들

그 한 켠 차일 그늘 아래선 국수를 말아 팔고

배꼽도 다 내놓은 아이 아까부터 칭얼대며

어머니 치마꼬리 늘어지게 잡고 따라다니는.

 

 


 

어머니의 길 황현중

 

 

신작로가 처음 나고 버스가 터덜털털

고샅길로 처음 들어오던 날 놀란 어머니가

원 난리다냐, 그러셨지요

여간 읍내 나갈 일 없는

어머니가 울컹덜컹 버스 타고

짜장면 한 사발 어찌어찌 잡수시고 오셔서는

세상 다 뒤집어졌구나, 그러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호멩이로 기어가는 밭두럭 길이었는데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기역기역 기어가는 논두럭 길이었는데

앞산 뒷산 두 동강 내고 으르렁 달겨드는

호랭이 물어 갈 신작로라니

당최 이게 뭔 일이다냐, 내동 고개를 내저으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모시 적삼에 짚신 삼아 신고

십 리도 못 가는 아리랑 눈물길이었는데

주린 배를 독새기풀로 연명하며

윤사월 해는 길어 눈물범벅 보릿고개 길이었는데

젊은것들 나 몰라라 대처로 다 내빼고

청바지 나팔바지 뾰족구두 입고 신고

공돌이 공순이 되어 돌아오는

호랭이 물어 갈 신작로라니

세상 다 망해 가는구나, 그러셨지요

어머니의 길은

다래며 머루며 붉은 멍석딸기 한 알

입안에 쏘옥 넣어 주던 오솔길이었는데

시집간 누님 석삼년 만에 친정 나들이 때

물에 젖을까 살포시 치마 들고

볼 발그레 건너던 징검다리 길이었는데

고된 시집살이 내색도 못하고

남몰래 눈물 훔치던 장독대 밑 씀바귀

씀벅울먹 뒤안길이었는데

대처로 나가 영 소식 없는 큰 자식

행여 오늘 올까 내일은 올까, 목 빼고 내다보는

썩을 놈의 신작로라니

할 말 잃고 그만, 입 다물고 말았지요

 

박복한 손금으로 울며 닦은 어머니의 길,

빗물로 머리 감고 은비녀로 쪽 짓고

달아 달아 보름달아,

정화수 앞에 두 손 모으며 밤새 울며 빌던

이제는 없는

이제는 없는 나의 어머니,

조선 어머니의 가르맛길

 

 


 

눈과 바람 - 정지원

 

 

눈이 내린다,

하안 입김 스며드는 순간들,

 

벌거벗은 나뭇가지 우듬지에

차곡차곡 쌓이고

 

내 손길로 쓸어내리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흘러가는 기억,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늙고 어설픈 꿈들

그 뒤를 따르며,

불쑥둘쑥한 벼 그루터기 위에

조용히 쌓이고,

 

바람은 다져 넣는다,

시간의 흔적을.

 

눈이 새를 타고 날아간다,

힘없이 흩어지는 그들,

 

논둑 들풀을 덮어 간다

이 순간의 흔적,

 

잊은 속삭임처럼

끝없이 스쳐간다

 

또 다른 바람이 지나간다,

늙고 어설픈 꿈도 따르며,

하안 세계가 덮인 이곳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

 

그러나 여전히 남아

내 마음속에

소리 없이 스며든다.

 

 

*주간명월(우도8경)


 

모녀의 꿈 - 장문석

 

 

분홍 원피스의 앳된 소녀가 무대에 올랐다

네 발 보행기를 조심조심

넘어질세라 엄마가 옆에서 잡아주고 부축했다

마이크 앞에 이르자 엄마는 재빨리 딸 뒤로 숨어

두 무릎 꿇고는 혹시나 딸을 떠받쳤다

장애인의 날 노래자랑 무대에서였다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나에겐 꿈이 있어요,

불려야 할 노래가 있어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였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는 거였다

그게 꿈이라는 거였다

엄마는 대견하다는 듯

그 꿈이 곧 엄마의 꿈이 아니겠냐며

환한 미소로 손장단을 쳤다

 

I believe in angels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나는 천사의 존재를 믿어요

보는 것마다 원가 좋은 게 있어요

 

뒤돌아보는 딸의 눈물과

올려다보는 엄마의 눈물이

반짝, 마주 빛났다

순간, 보행기를 놓친 딸이

비틀, 했다 엄마가 황급히

딸의 다리를 껴안았다

 

l'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강을 건널 거예요

나에겐 꿈이 있어요

 

관객들은 시나브로 물소리에 젖기 시작했다

찰방찰방, 낮지만 결코 끊일 수 없는……

모녀는 이미 강을 건너고 있었다

막이 내렸는데도 조명이 꺼졌는데도

오래도록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 스웨덴 출신 혼성 그룹 ABBA의 노래

 

 

 

                                  *월간 우리5월호(통권 제443)에서

                                    * 사진 : 제주시 우도에서(2025. 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