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의 시(4)

by 김창집1 2025. 5. 19.

 

 

진눈깨비

   -형무소 가는 길

 

 

눈물이 마르기 전

항구에 닿았다

 

풍문에 묻어오던

가벼운 목숨들

 

파르르 포승에 묶여

목포항에 내렸다

 

온몸을 후려치는

칼날 같은 진눈깨비

 

폭도 새끼! 빨갱이 섬 것들!

침 뱉으며 달려드는

 

너덜한 갈옷 사이로 파고드는 저 욕설

 

 


 

엽서 한 장

 

 

붉은 소인

마포 형무소

아버지 엽서 한 장

 

낭설처럼

생트집처럼

인생에 끼어들어

 

와르르 허물고 가는

천추의

낙인

 

반백 년 흘렀어도

풀지 못한 한이 있어

뿔뿔이 흩이진 가족

그 안부 다시 묻고

명 긴 게 벌이라시던

어머니 생각합니다

 

인생은 낙장불입

못 바꾸는 패 하나

 

빈속에 깡소주

웃풍 심한 냉방에서

아버지

서러운 생애

 

그리움으로 마십니다

 

 


 

벚꽃이 피면

 

 

  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 치던 어느 겨울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 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새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메기독딱

 

 

  지나 온 밤들을 지우고 싶었지

 

  생각의 마디마디 아리고 쓰라려 수없이 뒤척이며 함께 울던 제주바다, 짧으면 삼 개월 길어도 일 년이랬지 눈 붉은 새벽녘 형무소 도착하고 15년 형이란 걸 그제서야 알았지 어둠 속 검은 손들이 목을 조를 때마다 보고픈 당신을 품고 견뎌내던 검은 시간 목숨이 길어 가면 욕들만 무성할 뿐, 형기가 반으로 줄어 76개월 만기출소, 417원 받고 나와 머리 깎고 마신 막걸리

 

  남은 건 바람 소리뿐 메기독딱 그것뿐

 

 


 

딱 한마디

 

 

  울음마저 잊어버린

  깊은 눈의 새 한 마리

 

  무거운 짐 혼자 지고 먼 길 걸어왔지요 판결문도 없는 재판 하염없는 옥살이 말문 닫은 동백꽃 고개 숙인 봄마다 웃음도 울음도 저만치 또 멀어져 백수를 눈앞에 둔 백발의 할머니 70년 만의 재심 법정 휠체어 타고 나와

 

  최후의

  진술 한마디

  나, 죄 어수다!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