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진눈깨비
-형무소 가는 길
눈물이 마르기 전
항구에 닿았다
풍문에 묻어오던
가벼운 목숨들
파르르 포승에 묶여
목포항에 내렸다
온몸을 후려치는
칼날 같은 진눈깨비
폭도 새끼! 빨갱이 섬 것들!
침 뱉으며 달려드는
너덜한 갈옷 사이로 파고드는 저 욕설

♧ 엽서 한 장
붉은 소인
마포 형무소
아버지 엽서 한 장
낭설처럼
생트집처럼
인생에 끼어들어
와르르 허물고 가는
천추의
저
낙인
반백 년 흘렀어도
풀지 못한 한이 있어
뿔뿔이 흩이진 가족
그 안부 다시 묻고
명 긴 게 벌이라시던
어머니 생각합니다
인생은 낙장불입
못 바꾸는 패 하나
빈속에 깡소주
웃풍 심한 냉방에서
아버지
서러운 생애
그리움으로 마십니다

♧ 벚꽃이 피면
이른 봄
쇠창살로
햇살이 숨어든다
어느 날 빨갱이 기집이라고 느닷없이 잡혀갔을 때 내 등엔 세 살짜리 딸이 업혀 있었고, 새 생명 하나 움트고 있었지. 이유도 물을 새 없이 몽둥이찜질 당했지. 비바람 치던 어느 겨울밤 난생 처음 배를 타 봤어. 어디로 가는 건지 왜 나를 끌고 가는지,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어. 죽음보다 더한 공포, 물을 수가 없었어. 동물적 본능이었을까 시퍼렇게 참던 아이. 맞은 다리 찢기어 썩어들고 진물 나고 흰 뼈가 다 드러나도록 신음 한 번 안 낸 거야. 어미라는 작자가 제 새끼 아픈 것도 모른 거야. 마지막 의식인 듯 어미젖 부여잡고 싸늘한 입맞춤으로 작별인사 하고 갔어.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거기가 어디였을까? 묻어두고 안동으로 이감되는 날, 벚꽃 핀 걸 보았어.
딸아이
옹알이처럼
내려앉고
있었어

♧ 메기독딱
지나 온 밤들을 지우고 싶었지
생각의 마디마디 아리고 쓰라려 수없이 뒤척이며 함께 울던 제주바다, 짧으면 삼 개월 길어도 일 년이랬지 눈 붉은 새벽녘 형무소 도착하고 15년 형이란 걸 그제서야 알았지 어둠 속 검은 손들이 목을 조를 때마다 보고픈 당신을 품고 견뎌내던 검은 시간 목숨이 길어 가면 욕辱들만 무성할 뿐, 형기가 반으로 줄어 7년 6개월 만기출소, 417원 받고 나와 머리 깎고 마신 막걸리
남은 건 바람 소리뿐 메기독딱 그것뿐

♧ 딱 한마디
울음마저 잊어버린
깊은 눈의 새 한 마리
무거운 짐 혼자 지고 먼 길 걸어왔지요 판결문도 없는 재판 하염없는 옥살이 말문 닫은 동백꽃 고개 숙인 봄마다 웃음도 울음도 저만치 또 멀어져 백수를 눈앞에 둔 백발의 할머니 70년 만의 재심 법정 휠체어 타고 나와
최후의
진술 한마디
나, 죄 어수다!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 (한그루,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주4․3 '77주년 추념시집'의 시(1) (6) | 2025.05.21 |
|---|---|
|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1) (2) | 2025.05.20 |
| 계간 '제주작가' 2025 봄호의 시(3) (0) | 2025.05.18 |
| 강윤심 시집 '속울음으로 꽃망울 맺고'의 시(3) (3) | 2025.05.17 |
|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12) (3) | 2025.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