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할머니의 우산 – 이상연
화창한 날을 잊혔고
비 오는 날은 찾았다
외삼촌 사업한다고
땅과 산이 가랑비 젖을 때
시집간 고모 이혼한다며
갑작스러운 장대비 뿌릴 때
할아버지 중풍에
긴 장마 지속됐을 때
등이 굽은 우산은
아주 당연하게 불려 다녔다
그때마다
머리카락 젖을라, 옷 젖을라
있는 힘껏 둥글게 등을 폈다
행여 빗소리 놓칠까
현관 구석을 고집하며
웅크려 쪽잠을 잤다
서풍의 비바람 몰아치던 밤
섬망의 빛 흘려 놓고
홀로 선산으로 가셨다
접히지 않는 봉분 우산이 되어

♧ 빗소리 – 이범철
창문 넘어오는 빗소리 가슴께 두드린다
색깔 고운 소리에 잠을 깨어 창밖 수북이
어깨 부딪치며 굴러가는 소리 줍는다
여름날 한때 먼먼, 잊어버린 이름 불러와
내 고인 턱 아래 놓고 떠났던 소리의 알알들
때로 날아가 버릴 듯 부풀어 오르던 청년의 가슴
습자지 같은 젖은 빛깔로 적시며
가라앉혀 놓던 소리의 물결들
여름 지나 가을 드니
붉고 노란 얼굴로 말하고 있다
저 둥근 소리 손바닥 가득 주워
가슴의 빈 주머니 채워 돌아온다
가을을 지나가는 이여
고개 들어 빗소리와 마주 앉아
지나쳐 버린 아쉬운 이야기를 밤새 쓰자
낡고 바랜 신발을 신고 거리에 서서
색색의 가을 빗소리를 밟으며 걷자
수풀 쌓인 무너진 길을 가만 걸으며
발등으로 오르는 빗소리를 바라보자
내 쓸쓸해진 가슴이 다시 붉어질 때까지
우산도 없이
걷고 걷자

♧ 그날 이후 – 신호철
글 속에 숨고 그림 속에 번질게요 익어 가는 시간들이 쓸쓸해져요 마주하는 모든 시간 내내 웃지만 다가오는 모든 풍경들은 아픔인 걸요 놓칠 수 없는 시간의 간극 속에 머무를 뿐 닫을 수 없는 밤은 늘 추위처럼 스며오는 것이죠 달이 지고 나면 아침은 늘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와요 거기 계세요 손짓하는 나를 보시면요 늘 정면에서 바라보지 못했어요 잎이 흔들리고, 자동차 경음이 울리고 신호등 파란불을 따라 그리로 가고 있어요 커피 향을 닮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요 잡은 손을 놓친 것보다 더 기대고 싶어져요 돌아선 뒷모습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려 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잘 가세요 환한 대낮을 등지고 걷고 있어요 바람에 밤나무 꽃이 아래로 떨고 있었고요 강물을 바라다보는 일이 서로 편해진 오후 흐르는 물속에 그대 웃음소리가 들려요 내가 힘들어도 그대가 기쁘다면 나는 강물이 되어 멀어져도 슬퍼할 리 없어요 낯선 방에 누워 있어요 집을 받들고 높게 옷 벗은 나무들 천근의 눈꺼풀을 껌뻑이며 지탱하려고 수십 번을 뒤척였어요 한번은 어린아이마냥 천진한 마음으로 또 한 번은 천천히 누르는 아픈 통증으로요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강물은 까마득히 멀어져 낯선 이의 뒷모습으로 흐르고 있어요 귀를 막고 싶은 옆자리가 추워요 바다로 흐르는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무너뜨려야 할 짐을 건네주는 밤은 너무 검어요 두리번거려도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새벽 기대할 수 없는 시간의 느린 걸음에 지쳐 가고 있어요 지나간 어제도 맞이할 오늘도 꿈같은 내일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흐트러진 걸음을 여미게 해요

♧ 동거 – 성숙옥
얼마 전까지
생명선이 이어지던 자리를 본다
10년이 넘게 함께한 관음죽
귀퉁이가 갈라지다 혼을 놓고 말았다
새파랗게 맴도는 허공의 돋을새김
빛은 더 이상 그 그림자를 만들지 못한다
넓고 큰 화분이라서 허전한 곁에 들여놓은 제라늄 때문인가
저 화려한 향기가 틈을 벌리다 무너뜨렸다니
꽃과 어우러지는 걸 보고 싶은 우매한 마음 때문
숨죽인 날도 굽이친 시간도
만나고 보내고 그리다 사라진다지만
오랜 눈 맞춤의 날들은 뾰족한 이별의 날이 되었다
큰 공간 속 혼자 남은 분홍 제라늄
공기를 부풀리며 아쉬움 없는 눈빛 반짝인다

♧ 봄은 아직 오지 않네 - 백수인
봄이 오지 않네
입춘, 우수, 경칩 다 지나도
봄은 아직 오지 않네
낮과 밤이 평등하게 시간을 나눠 갖는
춘분날 아침 강변에 나가네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가슴을 안고
강변을 걷네
강물은 아직도 차디찬 속울음을 울고 있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날아갔을까
빈 나뭇가지는 살며시 초록빛 눈을 뜨려 하는데
그 사이로 찬바람이 쌩쌩 지나가고 있네
한참을 걷다가
눈을 들어 강 언덕을 쳐다보니
멀리서 봄이 오는 모습이 아련히 보이네
봄이 목발을 짚고 걸어오고 있네
우리들의 봄은
다친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리며
안간힘을 쓰며 뒤뚱뒤뚱 다가오고 있네
*월간 『우리詩』 2025년 5월호(통권 제44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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