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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13)

by 김창집1 2025. 5. 29.

 

 

깊은 사연

 

 

  196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이다 태풍이 불던 어느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이 계곡 저쪽에 있는 대처로 외출할 때 이용하던 다리가 통째로 가라앉았다 당장, 스무 가구 오십여 명의 발이 묶였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중단되었다 대처로 가기 위해 계곡을 건너는 것은 많은 시간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갹출을 해서라도 가라앉은 다리를 복구하고 싶어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소망에 머물렀다 관할 군청도 그들의 소망을 계속 외면했다

  몇 년 뒤, 마침내 이 마을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이 마을 출신인 한 청년의 갸륵한 노력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튼튼한 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었다 서울 중앙 부처의 어느 부서에 근무하는 청년이 그렇게 큰일을 해내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 청년은 아주 오래전에 계곡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사망한 마을 사람의 큰아들이라는 사실을

 

 


 

떠도는 소문

 

 

정체 모르는 소문이 마을 곳곳을

뿌연 공기처럼 떠돌아다녔다

 

대문마다 빨간 색깔의 낙서로 가득했다

입을 굳게 다물기로 유명한 마을 어른도

이 소문에 대해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래, 소문은 뚜렷한 진원지 없이도

저절로 퍼지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엔 틀림없이 비밀스러운 사연도

부지기수로 기득 차 있을 터였다

 

소문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일부 주민이 장난삼아 꾸며낸 것으로

치부하고 말자는 쪽은 소수였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쪽은 다수였다

 

소문은 일상의 시간을 지우면서

깊은 계곡으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보름 정도의 날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 날, 마침내 소문의 진상이 밝혀졌고

주인공은 태연한 얼굴로 마을을 떠났다

 

신통한 것은, 집 대문에 쓰여 있던 빨간

색깔의 낙서들도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풍경

 

 

얼룩무늬 도자기에 담길 때

다 담기지 못하고 남겨진

생애의 부스러기들이

화장터 건물 뒤쪽으로 흩뿌려졌다

 

이를 본 친척 몇몇 사람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어슬렁대다가

이내 손을 털며 돌아선 것 말고

관심을 끌 만한 장면은 더 이상 없었다

 

일기예보에서도 찾을 수 없던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시간에는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봉분 위를

한 마리 나비가 외롭게 날아다녔다

 

남긴 작업실에 걸린 풍경화에는

반쯤밖에 자라지 못한 풀들이

하늘을 항해 소리치고 있었다

 

한 생애의 평범한 풍경이었다

 

 

 

 

소통의 방식

 

 

먼지 쌓인 서랍에서,

책더미 속에서 찾은 편지를

얼핏 볼 때마다 곤혹이 뒤따랐다

 

칡넝쿨 무늬가 즐비한 편지지에다

봉투에 노란색 띠까지 두른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편지 글자들이 그냥 누워 있지 않고

왁자하게 거친 물결소리를 내던

젊은 시절이 떠오르는 날 오후엔

마당 구석에 외롭게 핀 야생화

한 그루가 얼른 내게 다가와

흐린 시야를 더 흐리게 만들었다

 

풀을 뜯던 마구간의 수말들이

갑자기 소리 지르는 광경을

부지기수로 많이 보았던 터였다

 

일부러 만든 침묵이 계속되면

사방으로 마음을 이동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아 해가 질 때까지

바닷가에 앉아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전달하려면

며칠 이상을 온통 삭여야 했다

 

가파른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만났다

소통할 때마다 입은 머리의 상처들을

 

 


 

짧은 웃음소리

 

 

  어느 가을날 오후, 우리는 차를 타고 운동회가 열리는 초등학교로 가는 중이었다 갑자기 그의 입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때, 조수석에 앉은 나는 구름이 한가롭게 노니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여름의 기분 좋은 추억에 젖어 있으리라고 짐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짧은 웃음소리를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짧은 웃음소리의 정체는 나의 짐작과 아주 달랐다 세상의 어이없는 일에 대한 울분을 참기 위해 무진 애쓰는 과정을 거치면, 그 울분은 급기야 웃음소리로 바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렇게 볼 때, 그것은 웃음의 일반적인 통로와는 아주 다른 곳에서 나온 것임이 확실했다

  사람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과 매체에 보도된 사실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당연한 일처럼 여겼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짧은 웃음소리를 터뜨리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을 터였다 그의 짧은 웃음소리를 분석하면, 거기에서는 분노도, 욕설도 다량으로 검출될 가능성이 많았다

 

 

                         *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

                                        * 사진 : '쿠바의 자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