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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by 김창집1 2025. 5. 31.

 

 

그리고 비 - 김혜천

 

 

물방울을 빨며 돋아 오르는 봄의 발걸음

너의 경쾌한 음계를 듣기 전

 

침묵을 배우는 일이

자신을 되찾는 길이기에

낮게 가라앉아 무리에서 떠나 있었다

 

빛이 바람에 흩어지는 거리에서

나뭇가지에서 돋아 오르는 함성과

옹알이하는 새 등을 타고

묵은 감정이 떠나가는 소리 듣다가

 

때마침 내리는 비가

그간의 분심紛心 식히기에 적절하여

창문 활짝 열어 빗소리에 귀를 댄다

 

자분자분 비 내리는 밤을

뒤척이지 않고

어찌 네게로 가겠느냐

 

몇 번 비 더 내려

뼛속 깊이 스민 결빙 풀리고 나면

함께 계곡을 흘러 강이 되고

기어이 바다에 닿으리라

 

살아오면서

큰소리 한 번 쳐보지 못한 나도

이 세상 내가 주인이라고 사자후 하면서

 

 


 

봄비 김정옥

 

 

집시처럼 떠돌던 구름이 빗방울을 고공낙하시킨다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린 빗방울이 달려온다

 

망설이던 친구도

겁 없이 뛰어내리는 친구들을 보고

뛰어내린다

 

찬바람에 웅크리고 숨어 있던 비둘기가

목을 축이러 나온다

 

오랜 목마름 끝에

수양매화가

봄처녀처럼 레이스 치마를

빨아 입고 외출한다

 

 


 

게릴라 가래닝* - 김성중

 

 

마당귀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가래가

나도 모르게 싹이 터서 자라더니

지난여름 이파리가 마당귀를 덮었다

 

마당귀 가래나무를 볼 때마다

어디에 옮겨 심어야 하는데

고민하며 머리가 아팠다

 

내란정국이지만 따뜻한 봄날에

오례천 대추교 아래 둔치

광보와 구억보 사이에

가래나무 세 그루를 옮겨 심었다

 

마항교 바로 위에 가래나무 군락이 있고

광보에도 가래나무가 살고 있어서

마당귀 가래나무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물을 좋아하는 가래나무

물가로 이사 갔으니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면앙정 앞을 지날 때마다 나는

오례천 둔치 가래나무를 떠올리며

인간세상의 꼬인 실타래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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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릴라 가래닝 : 어디든 나무나 꽃을 심어 꾸미는 게릴라 가드닝을 빌려서 만든 말.

 

 


 

럭키 데이 김미외

 

 

편의점 문이 열립니다

키가 큰 그녀가

 

하얀 바탕에 빨갛고 노랗고 초록초록한 커다란 꽃무늬의

짧은 치마를 펄럭이며 들어옵니다

오렌지색 단발은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습니다

쌍꺼풀 짙은 눈매가 매력이 넘칩니다

붉은 벨벳 립스틱 바른 입술엔 사랑스런 커다란 미소가 멈추지 않습니다

싱싱한 연두 블라우스가 살짝 비치는 자줏빛 가디건이 환합니다

플랫폼* 신은 풀빛 격자무늬 스타킹의 발걸음이 흥겹습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은 그녀가 자리에 앉아 가발을 벗습니다

목울대 불룩한 건장한 어깨의 청년이 라면을 먹습니다

핫바와 삼각김밥도 잊지 않았습니다

손님은 오지 않습니다

식사를 마친 청년이 가발을 씁니다

키가 큰 그녀가

하얀 바탕에 빨갛고 노랗고 초록초록한 커다란 꽃무늬의

짧은 치마를 흥겹게 펄럭이며 편의점을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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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tform : 여자 구두의 한 종류. 뒷굽인 힐 뿐 아니라 앞쪽 전체를 높게 한 구두로 통굽을 의미함.

 

 


 

집으로 간다는 말 김명리

 

 

벌레들 한 살림 차려서

귀퉁이 헐거워진 꽃받침 위로

산수국 연보랏빛 헛꽃이 아연 뒤집어져 있다

 

빛깔 바꿔 가며 꽃의 수분을 도운 뒤

끝내는 초록으로 갈변

잎의 역할까지 도맡는다 하는 산수국 헛꽃

 

내심으로는 혓바늘 같았을지도 모를

산수국 헛꽃의 우심실 좌심방 위로

쏟아붓는 광광한 햇빛 보노라니

 

헛사랑 헛세월 헛꿈

헛살았다는 말이 얼마나

장엄하고 크고 다정해 보이느냔 말이지

 

그토록 오래 꿈꾸었으나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는 말

 

당신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나

눈 한번 못 맞추고 돌아간다는 말

헛걸음했다는 말

 

누렇게 바랜 옥수수잎

댓바람에 쓸리는 황량지몽의 세월

눈사람의 숯검정이 눈썹

그마저도 이내 눈으로 물로 되돌아간다는 말

 

산수국 헛꽃 한 잎 이마빡에 붙이고

왔던 곳으로 헛둘헛둘

되돌아간다는 말 집으로 간다는 말

 

 

                   * 월간 우리20255월호(통권 제44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