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줄. 1 – 양동림
동네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맛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반나절 기다리고
30분이면 먹고 돌아갈
화사(花蛇)들이 무리지어 있다
한 끼 먹고 돌아가면 하루가 저문다
공원에 줄이 길다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며 공원으로 간다
무료 배식 한다고 아침부터 칙칙한 먹구렁이들이
또아리를 틀고 언뜻 비치는 햇살의 온기를 느끼고 있다
반나절 기다리고 짧은 한끼를 먹고나면
다시 내일을 기다려야 한다
맛도 모르고
배곯지 않으려 먹은 한 끼
내 일은 어디로 갈까 생각하며
소화돼 버릴까봐 일찍
잠자리에 들려는 소심한 줄이
흩어지고 있는 길목에
화사하게 꾸민 줄이 꿈틀거린다
맛있다는 소문에
기다리고 기다리다 마주한 음식
눈으로 먼저 먹고
SNS에 저장하면 배부른다는 사람들이
알록달록 꽃뱀처럼 꼬물거린다

♧ 귤 따는 해녀 - 양순진
늦가을 새벽 그녀는 서귀포 귤 따러간다 일당 주느냐고 했더니 주인이 지인이라 일당 대신 귤과 마음껏 대화할 수 있단다
정오 되자 천지간 비가 촉촉하다 서귀포 비 오느냐고 귤 못 따서 어떡하느냐고 전화했더니
서귀포엔 벳이 과랑과랑햄수다 귤 하영 탐수다
카랑카랑한 제주어로 귤밭 수놓는 그녀 동글동글한 얼굴에 슬픔 머금은 동그란 눈 열두 살에 해녀였다는 그녀는 물질로 귤을 따는 중이다 굽이굽이 물살 헤치며 제 할일 다한 순간을 이해하는 중이다 아니 자기를 해체 하는중이다
그래, 귤과 실컷 실마리 풀고 오세요
물질도 귤 작업도 초보인 나는 그녀를 통해 뒤늦게 배운다 마치 엄마와 아기 같이 우리는 서툴지만 끈끈하다 비와 햇살 사이 그녀와 나 사이 푸른 별들이 귤밭 돌담 구멍 메우고 있다

♧ 섬의 고리- 오관석
가시리 역기남도*
할아버지 봉분 한가운데
고사리가 솟아나 있다
하늘 향해 뻗은 줄기 끝
동그랗게 말린 고리모양
무엇을 걸어 잇고 싶어
고리를 만들었을까
섬이 화염 속에 무너진 시대
불타는 오름 재가 된 마을
그 속에 뿌려진 종자들
그 위에 뿌려진 골분들
아래 세상에서 자라
위의 세상을 걸어
땅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서 자라나
땅 아래 사람들과 땅 위 사람들을
이어주는 고리들
사람들이 살던 자리
채워진 무덤들
무수한 고리들이 솟아나 있다
잡아 끌어올리는데
지켜보던 까마귀들이
악악 비명을 지른다
---
*제주4․3 당시 사라진 마을.

♧ 파수꾼 – 장이지
“이스라엘의 격렬한 공습으로 레바논 남부의 대부분 지역은 폐허가 되고 수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어제 레바논의 사망자 수는 지난 한 해 동안 가자 지구의 일일 사망자 평균치를 넘어섰습니다. 그 수치는 시리아 내전이 가장 극심했던 해의 일일 평균 사망자 수를 두 배 이상 웃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수치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참상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2024년9월 24일의 메모)
파수꾼은 밤이 팽창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울타리가 무너진 집에서 빈사(瀕死)의 새가 자기의 그림자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파수꾼은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선대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 자기가 진 빚을 계산하고 있었다 파수꾼은 답을 몰랐다 파수꾼은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냈다 암흑 속에서 누군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파수꾼은 낮은 소리의 부름을, 그 부름에 응하는 자기의 떨리는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그려보려고 했다
파수꾼의 혼(魂)은 자기를 수집하고 있었다
밤하늘에 눈처럼 생긴 달이 떠 있었다 흰구름이 어둠의 피부를 훑고 지나갔다 외로운 망루 위에서 파수꾼은 보고 있었다

♧ 지워지는 발자국 – 홍미순
주름진 기억을 그려 놓은 드넓은 백사장
꾹꾹 남기며 걷던 발자국이 사라진다
날마다 지워지고 떠오르는 물 주름의
기억은 아픔이었지
밀물을 끌고 와 코콜이 쓸어버린 핏자국
모래 속 깊숙이 곱아 있던 뼛조각들은
모래성 쌓던 어린 손에 잡혀 나왔다죠
군벗처럼 갯바위 틈에 붙어 있던 삼촌
수색대가 목까지 차올라 밀항선 타고
바다에서 사라진 도피자로 지워졌죠
한모살 너머 떠올라 다시 붉게 사라지는
인선의 어머니 머릿속에 새겨진 물 주름
내 머릿속에 그려 놓은 소설* 속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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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계간 『제주작가』 2025 봄호(통권 제8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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