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전능의 화가
툰드라에서 그는
동토의 청량함으로
오로라를 그리는 빛의 화가
이 겨울
하염없이 내리는 는
흰 빛, 그 찬란함으로
쓸쓸한 새벽길과
한낮, 도시의 굉음을 덮어
눈부시게 지우고 있다
어둠을 덮고
고통을 덮고
슬픔을 덮고
모든 색을
오직 흰 빛으로
사랑, 그 순결을 그리고 있다

♧ 하늘 길
새벽 고내봉*을 오르는 것은
네 미명을 짚어 가는 길,
마음에 촛불을 켜는 일이다
때로 넘어져서 올려다본 하늘에
솔숲 울울한 틈새를 열어
하안 기원의 강이
굽이굽이 산을 오르고 있다
오른편 능선에 공동묘지와
왼편으로 보광사를 끼고
한 걸음씩 더듬어 산정에 이르러
거기, 미답의 허공이 열리고
처음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바닷바람은 순연(純然)하여 너는
한갓 흔들리는 풀잎
산의 숨소리를 듣는다
샛별은 오늘의 묵시로 빛나고
순례자의 동녘으로 숨이 찰 때
도저한 미명을 해치며
한 아름 애드벌룬을 띄우는 태양
하늘도 바다도 화염에 타오른다
물이랑마다 너울지는 생명의 불꽃
물새 한 마리 바디를 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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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내봉 : 제주 고내리에 있는 비고 176미터의 산. 고내오름이라고도 함.

♧ 존재
무심한 날들은
소나기 소리 따라
자르르 가버리고
헐떡거리며
산을 넘어온 것들
불을 끄고 가슴을 칠 때
“똑, 똑, 똑!”
누구신지,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너로서
전부인 존재,
우주는 너로 있다.”
창가에
쏟아지는 달빛
베갯머리를 적시는
귀뚜라미

♧ 나 까딱없어
훈병시절 완전 군장하고
20km 행군할 때 발에 물집이 터져
절뚝거리며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사순절 순례의 길을 걸을 때
젊은이들 따라 제주올레길을 걸을 때
팔십 중반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지원차량에 떡 앉아 가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고 걸었다
“장로님, 그만 차를 타시죠?”
“나, 까딱없어!”
허장성세로 삼만 보를 걸었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고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니고
입에 거품이 일어도
“나, 까딱없어!”
죽을 둥 살 둥 걸었다
마음은 푸른 하늘이었다.

♧ 가을의 기도
열정의 무대는 막을 내리고
들판에 휑한 바람이 스산합니다
길가에 풀씨들이 톡톡 튀고
한 여름을 다 태우고 고요한 매미
까만 등껍질 위로 햇살이 따뜻합니다
흐느끼는 억새, 하안 나비들이
단풍 숲 너머로 떠나갑니다.
오늘도 숨 가쁜 하루
물속으로 잦아드는
장엄한 일몰의 때를 기다려
주여! 손을 모으고 눈을 감습니다
이내 북풍이 불어 닥치고.
산과 들, 낮은 지붕에도 눈은 내리고
세상의 헛된 말과 혼잡한 사상(事象)들이
순수한 빛으로 환원 될 것을 믿습니다
모든 연주를 끝내고 허허한 숲
멀어지는 뒷모습이 쓸쓸하지만, 주여!
오래 꿈꾸어오던 평화와 안식
하안 축복을 평평 내리시고
나목의 단출함으로 서게 하소서.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 (푸른생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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