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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완)

by 김창집1 2025. 6. 8.

 

 

잔인한 반칙

 

 

나뭇가지들 사이로 간간이 움직이는

둥그런 달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선 레슬링 경기가 한창이었다

상대 선수의 지친 기색을 알아차린

선수가 심판 몰래 허리춤에서 너클을 꺼내

오른손가락에 재빨리 끼는 게 포작되었다

 

심판도, 상대 선수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시청자들만 알고 있을 뿐

 

너클 주먹에 맞은 선수가 쓰러졌다

너클 낀 선수가 쓰러진 선수를 커버했고

심판이 한걸음으로 달려가 카운트했다

! ! 쓰리!

승자와 패자가 단박에 결정되었다

너클 낀 선수가 두 손을 들며 웃었다

 

빛나던 달이 자취를 감추고

추위의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꽃을 촬영하는 법

 

 

세상사에 공명할 때 비로소

세상사를 남길 마음이 생겼다

 

꽃을 촬영할 때 필요한 것은

꽃의 생애에 공명하는 마음이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을 똑같이

대하는 일은 맹목이므로

어떤 꽃에는 특별한 시선을

다른 꽃에는 평범한 시선을 보냈다

 

줌업으로 접근해 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은 쓸모없었다

꽃은 오로지 꽃 자체로만 존재했다

 

꽃을 화려하게 만드는 노력이

성공한 예를 찾기는 어려웠다

꽃은 꽃의 자태만을 드러냈다

 

꽃 촬영은 촬영의 의도가

멀리 사라질 때 완성되었다

 

 


 

간곡한 전언傳言

 

 

저 험한 산을 반드시 오를 각오로

힘차게 출발하는 일이라고 한다

눈앞에 수시로 웃으며 찾아오는

다디단 휴식의 유혹을 물리치고

가벼운 돌멩이도 무겁게 밟으며

항상 조심하는 일이라고 한다

바람이 불고 눈비가 내린 뒤의

아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햇살을

찾아내는 뜻깊은 일이라고 한다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의 장막을

애써 지우는 일이라고 한다

머리 가운데에 자리 잡은

몽상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한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들어도

게으름의 끊임없는 공격으로부터

를 막아내는 일이라고 한다

매일 쌓여가는 공론의 관념을

철저히 부수는 일이라고 한다

결국 마지막엔 조차 몰라볼

다른 를 만드는 일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파도를 넘어서는 것은

 

 


 

팬터마임, 닮은꼴

 

 

검은 막이 수직으로 올라가자마자

무대 중앙에는 조그만 원들이 흩어진다

 

주인공이 재빨리 관객에게 몸짓으로 말한다

성스러운 빛은 지금껏 내려오지 않았다고

 

시골 수도원장의 착한 아들인 주인공은

아주 낡은 손목시계를 연거푸 들여다보며

필시 무엇인가 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사방을 둘러보는 엑스트라도 마찬가지다

 

미리 약속한 대로, 배우들은 모두 침묵한다

 

무대 뒤에 산처럼 집결한 수많은 비밀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멀리서 걸어오는 누군가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강아지들이 대문 앞으로 뛰어가 짖기 시작한다

 

점퍼 차림의 젊은 사내가 무대 뒤쪽으로 달려가

벽에 정렬해 있는 스위치들을 차례대로 켠다

엘이디 등 불빛이 퍼지면서 어둠이 완전히 걷힌다

 

오늘도 특별한 사건을 만나지 못한 주인공은

이제, 연극은 끝났다는 표정을 짓는다

 

관객인 나 또한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춤추는 마을

 

 

   사건은 마을의 도로 한가운데서 벌어졌다 마을 토박이인 무명의 남자 춤꾼이 짧은 막대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길을 지나가던 한 청년이 급히 도로로 달려가 다가오는 차들을 정지시켰다 춤꾼은 그 청년 덕분에 차에 치이는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춤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춤꾼은 그것에 개의치 않았다 범죄 신고를 받고 급히 달려온 경찰조차도 춤꾼의 기세를 막지 못했다 주위의 구경꾼도 이백여 명으로 불어났고, 급기야는 도로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춤꾼은 계속 춤을 추었고, 박수를 치며 춤꾼을 응원하는 사람들까지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잠시 뒤,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국면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춤꾼과 더불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음악이 거리를 꽉 채웠다 소문이 퍼지자, 이웃 마을에서도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춤꾼의 춤은 마을에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마을은 온통 춤으로 가득 채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춤꾼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춤추는 이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