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무의 기억법 – 김나비
여름을 키우느라 햇살에 힘줄 돋아
물오른 초록들이 주름살 펴는 오후
꽃 피는 가지 아래 바람 줄이 수런댄다
햇살의 씨줄 뽑아 바람의 흔적 꿰맬 동안
허기진 홑마음에 일렁이는 주름의 길
부르튼 맨발을 뻗어 강물 소리 듣는다
깊이 팬 새김 줄에 한 호흡 걸어 놓고
시푸른 상처 위에 매미 울음 덧칠할 때
환해진 생의 기억들, 풀 비린내 후끈하다

♧ 시골 빈 집에서 – 박선옥
십대 후반 고2 때인가
객사해서 마당 끝 장독대 아래 관을 두고
대청마루에서 큰딸 친구를 부여잡고 우시던 모습
눈에 선했다
세월은 젊음을 훌쩍 삼켜 버리고 말이 없다
장독대 오를 때마다 그 아래 관이 생각났다
마을 사람 이젠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남은 시골 빈집에서
유령처럼 반기는 눈빛들이
슬픈 내력을 적고 있다
다시 오지 않을
길을 보내는 심정으로
지상에서 마지막이었을
그니들의 밤을 적고 있다

♧ 특석에 앉은 냉이 – 박태근
다랑이 두둑에
삽자루 끄집은 소리에 뿌시시 일어나
여리디여린 내음 하나 믿고
꾀죄죄한 냉이 씻지도 않았는데
할미꽃 순에 이끌려
아지랑이 타고 넘고 건너다
마실 나은 아씨 콧등에 올라타
햇살 바구니 품에 안겨
찰카닥 카메라 영상 속에 사로잡혔다.
씻기고 데쳐 몸단장 시켜 주시더니
식탁 위에 특석을 잡아 주셔
조신하게 것가락 오길 기다리고 있다

♧ 풀다 – 송준규
풀건 풀어야 산다.
詩도 풀어야 온전히 품어 진한 감동 주고
굳은 몸도 풀어야 건강 돌보고
숙취도 풀어야 제정신 돌아오고
코도 풀어야 시원하고
가슴속 매듭도 풀어야 속 편하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병을 멀리하고
몸도 풀어야 아기가 태어나고
젖가슴도 풀어야 아기를 키우고
허리끈도 풀어야 볼일을 보고
옷고름도 풀어야 님을 품고
단추도 풀어야 쉼을 찾고
간장, 양념도 풀어야 음식 맛이 나고
면발도 풀어야 먹을 수 있고
비누도 풀어야 씻을 수 있고
머리도 풀어야 감을 수 있고
지갑도 풀어야 좋은 벗들 찾아들고
이야기보따리도 풀어야 좌중이 즐겁고
마음도 풀어야 주변을 돌아보고
미움도 원망도 풀어야 대 어깨 가벼워지고
시각도 풀어야 여유를 찾고
세월도 풀어야 인생의 묘미를 알고
사랑도 풀어야 나눌 수 있고
부부싸움도 풀어야 가정에 평화가 깃들고
마당에 묶인 백구도 목줄을 풀어 줘야 신나게 산다.

♧ 나는 나다 – 제갈양
요즘의 나, 맘에 들지 않아요
그래도 나는 나이지요
우리 사는 게 그렇듯이
맨날 좋을 수만 있을까요
맘에 안 들 때도 있어야
가끔은 뒤돌아보게 되겠지요
붉은 상처 위로 새살이 돋듯
곪아 터지고 딱지가 앉아야
다시 새로운 꽃이 피겠지요
*월간 『우리詩』 2025년 6월호(통권 제444호)에서
*사진 : 한라생태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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