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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의 시(2)

by 김창집1 2025. 7. 1.

 

 

패션시대

 

 

패션의 선두를 달리는

간판이 빛나는 가게

투명한 유리창에 비치는 네온의 거리

반투명한 구두와 즐비한 옷들 사이로

최신 유행의 패션복에

몸을 끼워 맞춘다

활짝 핀 얼굴로

새 옷에 몸을 집어넣고

옷이 짧다고 다리를 잘라내고

소매가 길다고 팔을 잡아 늘이고

가슴이 꽉 낀다고 가슴살을 잘라내고

고통을 참으며 최신 유행이라

포즈를 취하고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다

 

 


 

이계의 존재

 

 

거대한 꽃봉오리 위에서 낮잠을 자다 떨어졌네

사방에 거대한 꽃줄기들이 하늘 위로 솟아나는 공간

꽃잎에 가려 햇빛마저 들지 않는 음습한 땅

 

다가오는 이계의 존재

여섯 다리를 움직여 다가오네

앞발에 날카로운 톱니를 내밀고 쉭쉭거리네

그물망 같은 두 눈에 주변을 더듬는 섬세한 더듬이

탁탁 부딪치는 집게 입

 

사방에 널린 바위들 틈에 엎드려

숨소리도 가늘게 심장도 막고 어찌할까 고민하는데

뚝뚝 물줄기 소리에 올려다보면

거대한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 환계의 어떤 문을 열었길래

기괴한 공간에 떨어졌나 울상을 짓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물방울 하나 떨어지네

차가움에 일어나 앉아보니

왼손등에 병정개미 한 마리 올라타 더듬고 있네

 

 


 

싱크홀

 

 

단골 주점 바닥에 생긴 균열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

까마득히 들려오는 소리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들

 

추락하는 거는

어딘가로 일탈하는 거

바닥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세상의 중심까지 내려가는 거

끝없이 떨어지다 보면

결국 마주치는 빛

다른 세상으로 가는 출구

 

빛으로 나가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 위 오두막집

멀리 바다가 보이는 현관

마당 앞 커다란 팽나무와 벚나무

가지에 매인 해먹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웃으며 저녁 야외 식탁을 차리는 사람들

뒤편으로 보이는 노을들

 

다른 세상에서 웃고 떠들며 놀다

꾸벅꾸벅 취해 졸고 있을 때

누군가 깨운다

문을 닫을 시간이라며

웃는 주점 사장님의 얼굴

 

 


 

술잔 속 세상

 

 

술을 먹다 잔 속에

작은 은하가 보인다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는 은하

구석 자리에 작은 별 하나

 

푸르고 초록의 반짝이는 별

솜사탕 같은 구름 사이로 파란 바다

하안 해변과 넓은 잎의 나무들

나무 그늘 사이로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

 

드루이드일까

나무요정 일까

 

저곳에 가고 싶어

빌딩도 아스팔트도 없는

자동차도 스마트폰도 없는

외계의 별

 

홀로 불시착하여

나무 뒤로 오두막을 짓고

앞마당 평상에 걸터앉아

저무는 황혼을 느끼고 싶어

 

눈동자에 빨려들어 몽롱해진 채

술잔 깊이 빠질 무렵

잔에 뭐가 묻었냐며

타박하는 목소리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리면

친구의 벌건 얼굴이 보인다

 

 


 

시간의 바다

 

 

끝없이 울리는 전화와 모니터의 번뜩임

피곤에 절어 반쯤 감긴 눈으로 벽시계를 본다

 

시계가 환각처럼 흔들거리다 분열하더니 터진다

넘실넘실 시간들이 넘쳐 바다가 된다

그 위로 시계들이 떠다닌다

구부러진 시계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시계

구겨진 시계들이 시간의 대해에 떠다닌다

 

파도에 떠밀려온 해변

눈을 감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다

성지에서 기도하는 순례자들처럼

엄숙하게 꿈의 해변에 머물러 있다

 

네모난 사무실 비좁은 파티션에 숨이

시계를 빨리 돌리던 사무원들은

시침이 녹아 떠다니는 시계를 부여잡고

흐르는 시간의 대해 한가운데 허우적댄다

 

발밑에서 찰랑거리는 시간들을 느끼는 나는

기도하는 순례자들과 발버둥치는 사무원들 사이

해변과 바다의 경계에서 어쩌지 못해 서성인다

 

햇살이 쏟아지는 해변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 조각들

파도 속에 빛난다

 

 

                 * 시 :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 사진 : 7월의 시작, 나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