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끝에는 요정들이 살고 있을까
세상의 끝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꾼다
톨킨의 상상처럼
회색 항구에서 배를 타고
서쪽 끝을 향해 가다보면
뿌연 안개 너머의 땅
영원히 살아가는 요정들이 있을까
아니면
할락궁이가 다녀간
끝없이 펼쳐지는 서천꽃밭에
도환생꽃으로 환생한 사람들이
웃고 춤추며 머물고 있을까
팽목항에서 이태원에서
꿈을 펴보지 못한 채
먼저 떠난 아이들도
돈도 권력도 없는 세상의 끝에서
죽지 않는 요정으로 환생하여
웃으며 반겨줄까
꿈은 늘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못하고
가는 중에 끝이 난다
깨고 나면 꿈의 세상을 찾아
오늘도 여행을 꿈꾼다

♧ 밤의 사막
기나긴 송별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운 밤 거제동 골목을 걷다가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인공의 불빛들만 가득한 도시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별
길을 가다 말고 서서 바라보는
단 하나의 별
빽빽한 빌딩들 사이 골목 말고
걷고 싶었던 길은
별 보러 기는 길
확 트인 공간으로 떠나고 싶어
별빛이 흔들린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가로등 네온사인이 점점 꺼지더니
분열하는 별
사방으로 퍼져가는 별들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리면
발밑으로 펼쳐진 모래들
시린 바람이 불어오는
칼칼한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

♧ 어둠의 장막
소주한 병을 비우고 걷는
중앙동 골목은
깨진 가로등 불빛과
간혹 들리는 자동차 소리로
드문드문 채워진다
귓속에 이명을 안고 살아가는데
적막이 느껴지는 낡은 오피스텔
고장난 등이 깜박이는 계단은
어둠 속에 빛이 잠시 스쳐가는 공간
원룸의 문을 잡는다
문 안쪽 가득한 어둠의 소리
저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나
모리아의 깊은 어둠 속에 있던
불의 악령 발목
이벤트호라이즌호에 남기진
블랙홀 너머의 악령
무엇이 있든 간에
어둠 속에 누워 함께1
밤을 보낼 존재가 있으면 반가울까
문을 열어본다
어둠의 장막을 서서히 걷어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원룸
홀로 침대 위로 스며들어
눈을 감는다

♧ 소주 비가 내리면
하늘에서 소주가 비로 내리면
주점을 찾아갈 일이 없겠지
실연당한 이들이
공원 벤치에서 깡소주를 먹지 않겠지
공사판에서 돌아오는 이들이
편의점 벤치에 앉지 않겠지
네모난 화면 종일 부여잡아
벌게 진 눈으로 나오는 이들이
포장마차를 찾지 않겠지
소주가 흐르는 거리에는
서로 살을 맞대고 부비는 사람들
불그스레한 얼굴로 웃고 우는 사람들
위로 오르는 계단 따위는 없다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
연신 잔을 비우면서도
내 일의 노동을 걱정하는 사람들
오늘 저녁만큼은
모두 같은 소주를 먹겠지
소주를 찾는 사람들끼리는
빈 술잔만 하늘로 들어 올리면 되는
평등한 저녁이 되겠지

♧ 미치는 날에 만나요
늦은 퇴근길 비가 오면 녹아내리는 사람들이 빗물처럼 바닥에 뿌려져요 아스콘 바닥을 타고 흐르다 하수구로 들어가요 땅속 깊은 자리로 흘러들어가요 흘러가다 마주치는 황홀한 세계 우리 미치게 만나요 비가 그치면 다시 굳어져 서로 못 본 척하지만 사막 같은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 비가 오면 미치는 날 출근복은 벗어버리고 원피스 자락 휘날리며 힙합바지 내려 입고 섹시한 네온 불빛 아래 번쩍이는 입술을 하고 만나 춤을 춰요 짧은 스커트 헐렁한 빵바지하고 만나 껴안고 위로해요 찬란한 아침을 기다리며 뜨거운 인생을 꿈꾸고 종일 땀내 끈적한 일터에서 살아가는 우리 비 오는 날만이라도 미치게 만나요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사진 : 바닷속의 세상(더위 속에 찾아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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