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꽃
겨울에 피는 꽃이 있었지
아릿한 유년의 골목
볕 한 줌 깃들면
꽃눈도 없이
약속도 없이
일제히 꽃들이 피었지
추울수록 맹렬하게
한꺼번에 피어났지
볼이 발그레 피었지
눈이라도 내리면
우르르 벙글어져
무채색 골목길이
눈부시게 환했지
골목 끝자락 저녁놀 퍼지고
야윈 굴뚝마다 연기 뿜으면
가로등 없는 텅 빈 골목길 따라
가냘프고 따스한 꽃들이
한 점 한 점 줄 지어 피었지
길고 추운 밤을 껴안으며
밤새 꿈을 머금은 싱싱한 꽃들이
차디찬 아침마다 골목 안 한가득
햇살 따라 날마다 피었지

♧ 그냥 환하게
살구나무 우물가 농막에 앉아
환하게 한번 웃었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홍매화
빨갛게 피었다
홍매화 반가워 또 환하게 웃었다
키다리 산벚에 기댄 산수유
노랗게 피어났다
산수유 또 반가워 환하게 웃었다
살구나무 날아든 파란 물까치
긴 꼬리 까딱까딱 화답한다
집에 들어가며 환하게 웃었다
복슬복슬 수국 한 송이 파랗게 피어났다
주고받는 반주 잔에 웃음꽃 피고
침실 창문 톡톡 두드리는
달빛마저 환한 이월 보름밤
돌아온 봄이 반가워
그냥 환하게 웃었을 뿐인데
온 세상이 환해졌다.

♧ 비의 랩소디
빗방울이 창가를 스칠 때
슬픔은 음악이 되어 흐른다
눈물로 쓴 악보 위에
부서진 마음의 화음이 떨린다
떠나는 발걸음은 멜로디처럼
먼 곳으로 녹아 사라지고
“이젠 눈물 그치고 나를 봐요”
한줄기 빗물이 속삭이듯 닿는다
밤은 현악기의 울림으로 젖어 가고
고개 돌린 사랑은 잔향이 되어
텅 빈 방 안에 맴돈다
“세상에 내가 없다고 믿어요”
슬픔의 리듬은 고독을 삼키며
무너진 계절의 강을 건넌다
비는 이별의 칼날을 닦고
흩날리는 악센트로 새겨진
비悲의 한 획 한 획이
어둠 속에서 별이 된다
마지막 소절이 흐르면
빗물은 종이 위에 잉크가 되어
새벽의 악보를 적는다
“아주 먼 곳으로 떠나가요”
슬픔이 노래가 되는 순간
침묵은 광곡으로 피어난다

♧ 그 남자에 가 보라
버스 종점 근처 옥탑방에 사는
그 남자에게 가 보라
나이는 일흔이 넘었고
백발에 강렬한 눈빛을 간직하였다
오늘이 힘들고 외롭다면
그 남자를 만나
내일의 운명에 관해 물어보라
아마도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할 터이지만
그 남자 하던 일 멈추고
소탈하게 막걸리 한잔
함께 기울이자고는 할지니
숱한 질곡에서 벗어나
돌고 돌아 옥탑방에 자리 잡은
그 남자에게 가서 물어보라
어둠이 오고 내일이 오고
또 하루는 서글프게 기울어 가고
왜 만남은 노을처럼 지는지를

♧ 꽃잎 한 장 – 이상호
불어오는 비바람에 구겨진 그림자처럼
어깨 위에 기울기 시작한 우주 하나를
거뜬히 부려 놓는 일이란 아무래도 무리인 거야
앞섶 들추며 근심스러운 벼랑 근처를 서성였어
우주 하나 지우는 일 생각처럼 쉬운 게 아냐
비 젖은 사내의 등이 오늘 사뭇 후줄근했다잖아
꽃잎 한 장 거뜬한 진달래꽃의 잔해들을
가만가만 들어 보니 봄소식이 자글거린 거야
살며시 문지르고 가는 낭창한 꽃잎 한 장
*월간 『우리詩』 6월호(통권 제44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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