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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의 시(9)

by 김창집1 2025. 7. 26.

 

 

이비외솔耳鼻外松*

 

 

사람 같은

 

세월을 견딘 목숨의 숨뿌리 같은

 

휘휘한 바람소리에 쓰러져 누울 것 같은

 

다 떠난

동산에

홀로 선

죄인 같은

 

상처 깊을수록 입이 무거워지듯

군자의 유구무언 간절한 언약 같은

 

육백 년

노송 한 그루

증인으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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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중산간에 위치한 사라마을에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하여 이

비동산이라 불리는 동산이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43

초토화 작전으로 모두 불에 탔다. 그 난리 중에 타다 남은 소나무 한

그루를 이비외솔이라 한다.

 

 


 

꽃 피지 않는 봄

 

 

 애비 있는 산으로 뛰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죽어라 달렸어요 나도 이제 다섯 살인걸 서천꽃밭 흐드러진 환생의 꽃무더기 열린 동공 안으로 와락 안기고 날개가 돋으려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요 둥실 떠오르는 몸 아, 날개 생겼나 봐요 코끝에 확 스치는 풀냄새 아버지 냄새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 탕, , 타타당!아버지 등에서 흙냄새가 나네요 언제나 잉크냄새 났던 아버지 고개 들어 하늘 한 번 봤어요 잉크빛 하늘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아요 나, 잘 뛰었나요? 이제 아버지 만났나요? 졸려요, 아버지 얼굴이 안 보여요 등 돌려 나를 봐요 아, 졸려

 

 철모른 숟가락 하나

 떨어뜨린 어느 봄

 

 


 

산전山田* 가는 길

 

 

어수선한 세상에선 길도 길을 잃는지

해마다 오던 길 서너 시간 헤맸다

우거진 조릿대 숲만 딴청부리는 십일 월,

드문드문 노란 칠 암호 풀듯 찾아가는

시안모루 그 지점 노출을 꺼리는지

초록의 표고 밭 경계 그물망만 드높다

목숨 건 명분들이 하나둘 하산할 때

이십대 젊은 사령관 푸른 꿈도 흔들렸을

살아서 불안한 시간 섬찟 붉은 단풍이여

앓아누운 어둠 속을 맨발로 걷던 사람

천미천 마른 혓바닥 그날처럼 타들어

무더기 돌탑에 쌓인 꿈이 외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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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숲 시안모루에 있는 곳으로 무장대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 곳

으로 전하여짐.

 

 


 

산푸른부전나비

 

 

웃자란 엉겅퀴

그 위로

산푸른부전나비

흠칫,

제 그림자에 놀라

뒤돌던 유월 햇살

선흘리 동백 그늘로 아스라이 길을 낸다

 

길도 지쳐 누운 곳 들꽃들이 길을 열고

무언의 맹아 한 촉 뻗어나간 줄기마다

무자년 눈물방울이 콩짜개란으로 살아와

 

나뭇잎 하나에도 훔치던 눈물자국

돌멩이 하나에도 새겨진 비명소리

아직도 산푸른부전나비

원 그리며 나는데

 

되돌아 나오는 길

하늘 가득 두견새 소리

생과 사 그 경계에서

또 저렇게 울었을까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맴도는 저 푸른,

 

 


 

표선 백사장

 

 

바람의 손목을

물어뜯고 싶었어

 

명치를 때리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바다의 울음소리는

자꾸만 깊어지고

 

꽃다운 목숨들이 아무렇게나 스러지던

P읍이라고 했었어 피읍이라 들었지

 

그 밤은 용서하지 마

잃어버린 밤들을

 

새하얀 도화지 같은 모래사장 한모살에

목 잘린 꽃송이 붉은 넋을 위로하며

더 이상 작별하지 못한 이름들을 새겼어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한그루,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