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비외솔耳鼻外松*
사람 같은
세월을 견딘 목숨의 숨뿌리 같은
휘휘한 바람소리에 쓰러져 누울 것 같은
다 떠난
솔松 동산에
홀로 선
죄인 같은
상처 깊을수록 입이 무거워지듯
군자의 유구무언 간절한 언약 같은
육백 년
노송 한 그루
증인으로 서 있다
---
* 제주도 중산간에 위치한 사라마을에는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하여 이
비동산이라 불리는 동산이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였는데 4․3
초토화 작전으로 모두 불에 탔다. 그 난리 중에 타다 남은 소나무 한
그루를 이비외솔이라 한다.

♧ 꽃 피지 않는 봄
애비 있는 산으로 뛰어라
그러면 살려 주마
죽어라 달렸어요 나도 이제 다섯 살인걸 서천꽃밭 흐드러진 환생의 꽃무더기 열린 동공 안으로 와락 안기고 날개가 돋으려나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요 둥실 떠오르는 몸 아, 날개 생겼나 봐요 코끝에 확 스치는 풀냄새 아버지 냄새 아버지, 보고 싶은 아버지 탕, 탕, 타타당!… 아버지 등에서 흙냄새가 나네요 언제나 잉크냄새 났던 아버지 고개 들어 하늘 한 번 봤어요 잉크빛 하늘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아요 나, 잘 뛰었나요? 이제 아버지 만났나요? 졸려요, 아버지 얼굴이 안 보여요 등 돌려 나를 봐요 아, 졸려…
철모른 숟가락 하나
떨어뜨린 어느 봄

♧ 산전山田* 가는 길
어수선한 세상에선 길도 길을 잃는지
해마다 오던 길 서너 시간 헤맸다
우거진 조릿대 숲만 딴청부리는 십일 월,
드문드문 노란 칠 암호 풀듯 찾아가는
시안모루 그 지점 노출을 꺼리는지
초록의 표고 밭 경계 그물망만 드높다
목숨 건 명분들이 하나둘 하산할 때
이십대 젊은 사령관 푸른 꿈도 흔들렸을
살아서 불안한 시간 섬찟 붉은 단풍이여
앓아누운 어둠 속을 맨발로 걷던 사람
천미천 마른 혓바닥 그날처럼 타들어
무더기 돌탑에 쌓인 꿈이 외려 슬프다
---
*사려니숲 시안모루에 있는 곳으로 무장대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 곳
으로 전하여짐.

♧ 산푸른부전나비
웃자란 엉겅퀴
그 위로
산푸른부전나비
흠칫,
제 그림자에 놀라
뒤돌던 유월 햇살
선흘리 동백 그늘로 아스라이 길을 낸다
길도 지쳐 누운 곳 들꽃들이 길을 열고
무언의 맹아 한 촉 뻗어나간 줄기마다
무자년 눈물방울이 콩짜개란으로 살아와
나뭇잎 하나에도 훔치던 눈물자국
돌멩이 하나에도 새겨진 비명소리
아직도 산푸른부전나비
원 그리며 나는데
되돌아 나오는 길
하늘 가득 두견새 소리
생과 사 그 경계에서
또 저렇게 울었을까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맴도는 저 푸른,

♧ 표선 백사장
바람의 손목을
물어뜯고 싶었어
명치를 때리며
밀려갔다 밀려오는
바다의 울음소리는
자꾸만 깊어지고
꽃다운 목숨들이 아무렇게나 스러지던
P읍이라고 했었어 피읍이라 들었지
그 밤은 용서하지 마
잃어버린 밤들을
새하얀 도화지 같은 모래사장 한모살에
목 잘린 꽃송이 붉은 넋을 위로하며
더 이상 작별하지 못한 이름들을 새겼어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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