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섬의 새벽
궤에서 나온 사람들이 올려다보자 검은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사람들은 걸었다 바다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하늘과 가까운 산으로 올랐다 검은 비가 사람들을 검게 물들이고 검은 밤은 계속되고 검은 사람들은 검은 산을 계속 올랐다 검은 밤 검은 숲에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살을 찢는 매서운 바람에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지만 들리지 않았다 검은 밤이 소리를 먹었고 사람들은 침묵하게 되었다 검은 산을 얼마나 걸었을까 무수히 많은 시간이 검은 밤에 먹히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눈빛도 다 먹히고 난 후 검은 하늘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렸다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일제히 빛을 향해 올려다보았다 검은 하늘에 하나의 별이 떠 있었다 한줄기 별빛이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다 검은 사람들은 별빛을 향해 걸었다 별빛은 사람들이 걷는 산길을 비춰주었다 사람들은 별빛에 다가가려 산을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순간 검은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별빛에 닿을 무렵 검은 밤은 사라지고 별빛 환한 새벽이 오고 있었다 동쪽 끝에서 불그스레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 귓속의 이야기
그는 낫으로 이야기를 만들지 짙은 어둠을 타고 틈새로 들어오는 그는 낫 가진 이야기꾼 지는 어른들의 귀를 댕강댕강 잘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자른 귀를 모아 이야기를 만들지 그의 이야기는 귓속에 남은 부서진 섬과 산의 파편들 잘린 귀들이 쏟아내는 파편들이 뭉쳐 만든 이야기 목 없어 말 못하는 산사람들 귀 없어 듣지 못하는 섬사람들 낫을 휘두르며 꺼내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자지러지는데 어른들은 두 귀를 막고 숨이 넘어가지 머리빗을 빗어내듯 낫 끝을 귓바퀴 위에 얹으면 어른들은 두 눈을 꼭 감고 이불 속에 숨어 떠는데 아이들은 간지러워 깔깔대며 옛이야기에 빠져들다 잠이 들지 오늘도 불 꺼진 방구석마다 문 닫힌 벽장 속마다 놓아둔 귓속에서 이야기가 스멀스멀 새어나오는데 그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아이들이 웃다 잠드는 머리맡에 앉아 상상하며 으스스 웃는 귀 없는 이야기꾼

♧ 트롤*의 노래
숲길을 걷는데 어두운 나무들 사이를 걷는데 기다란 나무 뒤편 이상한 노래가 들리네 나무 뒤 돌무더기에 숨어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네 파란 하늘을 보고 싶어 눈부신 햇살을 보고 싶어 나는 돌의 아이 단단한 돌의 아이 어두운 나무들 사이를 건너 노래가 들리네 아이야 어디 있니 돌아가 보면 아무도 없이 주인 모를 무덤 몇 개 돌무더기 몇 개뿐 누가 노래를 휘이휘이 부르나 어두운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네 나는야 숲속의 돌 요정 숲에 사는 돌의 아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해방을 외쳤다가 뜨거운 햇볕에 굳어버렸네 숲으로 숨어 돌의 아이가 되었네 노래가 좋아 휘이휘이 칠십 년 지난 노래를 부르네 언젠가 세상에 나와 밝은 햇살 아래 노래 부르고파 관음사 옆 숲길을 걷는데 휘이휘이 밝은 노랫소리가 들리네
---
*북구신화에 나오는 거인족. 요정의 일종.

♧ 손가락
매서운 바람이 부는 날
더 매서운 눈들이 쏘아대는 날
이호국민학교*에 모인 사람들
시 커 먼 총구보다도 무서 운
콩 볶는 소리보다도 무서운
그것은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무서워 감은 눈
정수리와 마주치는 손가락
끝에 깃든 죽음이
정수리 숨구멍으로 쏘아져 들어가면
받아들이는 사람들
손가락의 힘은
어둠과 거짓과 폭력에서 나오는 걸
살아남은 사람들의 머릿속 깊은 자리
낙인으로 박혔다
손가락은 어디에도 있다
칠십오 년이 넘어도 사라지지 않는 악몽들
손주들의 손가락이
할머니를 가리킬 때마다
흔들리는 눈동자
손가락의 힘을 기억하고 있다
학교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잊혀가도
손가락은 남아 있다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도 있다
누구의 손가락인지 모를 공간 속
오늘도 누군가를 가리킨다
손가락의 힘은
그때부터 커진 건지도 모른다
---
*제주4.3 당시 토벌대가 이호2동 사람들을 집합시키고 학살한 장소. 지금
학교가 사라지고 흔적이 없다.

♧ 전망대
높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다들 개미 같아요
땅바닥만 바라보며 걷는 개미들
오늘도 개미굴 속으로 들어가는 개미들과
나오는 개미들이 엉켜 있네요
줄지어 들어가고 나오는 개미들은
하루 종일 위를 바라볼 일 없겠지요
바닥에 붙어버린 이차원의 생물들
고개 들 수 없게 태어난 거예요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면
다들 저리 조그맣게 보이는 걸
바닥에 붙어 다닐 때는
참 납작하게도 살았네요
그래서 높으신 어른들이
윗자리에 올라가려 애쓰나 봐요
꼭대기에 올라앉은 채
내려오기 싫은 건가 봐요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세상이 이리도 조그맣게 보이는 걸
삼차원의 공간에 올라선 사람만이
알고 있는 거예요
저 바닥 이차원의 공간에 갇히면
다시는 높은 자리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높으신 분들은 다들 알고 있나 봐요
그런데 이 높은 공간에
바람이 많이도 불어오네요
차가운 칼바람들이 사방에서 불어와
살갗을 헤집어 아픈 것이
높은 자리 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아요
잠시 머물다 돌아가야겠어요
하늘이 부럽지는 않네요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누리장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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