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김경훈
-따알리아를 위하여
지나간다
분명코 지나간다
암울한 기운이 삼재처럼 지속되고
주술에 걸린 듯 주눅들고 움추려들 때
그나마 기대했던 그 무언가마저 무너질 때
무너진 바닥마저 휘청거릴 때
이것은 지나간다
이것 또한 기어코 지나간다
옥죄는 모든 것들에 심한 내상을 입어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그 믿음마저 의심될 때
시간마저 독이 되어 내 삶의 의미와 가치가
뿌리부터 흔들릴 때
그러나
아무도 없다 느끼는 그때에도
캄캄한 전방의 낭떠러지 발밑에도
있다 분명코 있다 그 순간
의도하지 못한 뜻밖의 반전
그 누군가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로 인해 이겨내는 사람이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확신코
분연히 손 내미는 사람이 있다
그런 때
심중에서 완강히 나를 지탱하는
나의 자존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경련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지나가는 그 순간을
나는 담담히 응시한다 이것이 그간 나를 힘들게 한 것인가고
그리고 천천히 야무지게 다짐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견육점(犬肉店) – 김광렬
정의를 상호로 내걸고 불의를 팔던 가게는 파산했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몰락을 환호작약하는 것은
사람의 할 도리 아니다
덜떨어진 놈, 하고 자책하다 사안이 그만큼 엄중하니
법의 철퇴는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을 고쳐먹는 것이 순전히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렇다, 얼마나 거짓된 말로 진실을 구부려왔는가
상행위에도 상도가 있다는데
버젓이 양머리를 내걸고 몰래 개고기를 파는 일은
정도를 걷는 사람의 자세 아니다
소비자들의 잠자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하자
드디어 어두운 밀실에 잔뜩 쌓아두었던
불순한 욕망을 꺼내들었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짓쳐가다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어느 날 나는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몇 줌 불안과 걱정과 분노를 기어이 떨쳐내지 못하고
오래 허기져 비쩍 마른 들짐승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실을 서성일 때
아마, 평화의 시침이
오전 11시 남짓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을 것이다
심장이 새까맣게 타버릴 것 같은 찰나였는지 모른다
여덟 마리의 아름답고 단아한 새떼가
사월 초순의 매서운 꽃샘추위를 뚫으며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근황 – 김대용
1.
이제 더 이상 나는 서두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결정이나
규칙이나 지존한 법을 따르지 않기로 한다.
주저하는 마음과 어떤 옷을 입을까 타협하는 것도 싫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려고 했던 시기 코로나가 막았다.
몇 년이 지나자 나의 의도는 급속히 쇠락하였다.
남정네의 석양은 눈을 감았다 뜨면 떠나듯.
정신 차려보니 기력이 없어졌다.
무중력에서 걸어가는 꿈을 꾸고
실제의 골목길에서는 아주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지나가던 중년이 훨씬 지난 마른 여자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뭐라고 하며 지나갔다
격렬한 폭행 의도를 느꼈다. 다시 만날 일 없으면 하고
저 여자는 우리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아니길 바란 것이 전부였다
2.
아직도 누구를 속일 능력이 없다. 자존과 다툴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쉬 속는다
그리고 쉬 마음속 변화를 드러낸다. 보호색이나
포커페이스를 배위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리움이라도
조금 남아 있어서 떠주는 대로 먹지 못하는
또 다시 안타까운 사랑은 지운 지 오래다.
그런 재위지지 않는 갈증을
사막에서는 갈증을 겨우 채우면서 살았다. 그래도 산다.
맑고 차가운 물은 차지 않았고 겨우 흐르는 물을 적시며
욕조는 포기한다. 나이 들도록 유치한 것이다
3.
낡고 삭아버린 밧줄과 그리고 배당은 버린 지 오래다
그곳 어디인지 새로운 곳은 거의 없으나
다시 가고 싶은 곳이나 그리운 곳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곳이 있으면
이젠 갈 수 있는데 궁금해야 하는데
호기심으로 채울 것은 이제 없다.
어디에나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고 있다. 읽는 것보다
보는 시간이 많아서 보이는 것들에게 기웃거린다.
무관심과 사리와 분별없는 밥그릇 수가 많아진다.
상식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리고 낡은 눈에는 아직도 잘못된 것만 보이는 것인가?
4.
그들이 서툰 연기로 나를 지배하려 한다.
철저히 외면한다.
얼굴을 그림처럼 만들고 인형 옷 입었구나.
오늘은 미리 손질하고 나와 무슨 말을 하는데
어제의 말과 다른 말을 반복한다.
오래된 여행은 말을 믿지 않는다.
저잣거리 수십 년이면 나를 해칠 놈인지 아닌지
첫눈에 반하던지 수십 번 만나도 마음 가지 않던지
만찬에서는 배고프고 집에 가서 라면 하나 먹는 게
원 맛있지, 나는 이제 쉬 속지 않는다
꽤 만족한 삶이라고 작정하고 나니 편하다
5.
이런 날은 쉬는 게 낫다는 삶의 지혜를 몰랐다.
바다에서는 파도에 싸우고 밭에서는 병충해에 싸우고
진솔한 유튜브와 쓸데없는 관심을 경계할 것이다
당분간 나는 자유로울 것이다.
낯선 번호는 단절을 선택한다.
새로운 만남을 거절한다. 충분히 만났다.
설익은 잠에서 꿈결에선 자주 낯선 울음소리에 깬다.
창밖에서 고양이가 밤새 울었다,
유혹의 목소리를 변조한 목소리 애절하였다.
지금은 밤인가 낮인가 열두 번 부자음 소리는 열두 번쯤이다.

♧ 해녀콩 – 김병심
나는 소금기를 먹는 바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숨비기는 소금이 묻기 좋은 꽃을 피웁니다
나는 무관심했으므로 바다 곁에 살게 됩니다
거드는 일도 밤새 지쳐
축축한 바람도 숨죽이기에 좋은 짠내로 남겨집니다
나는 멀구슬 열매만 하게 생겼습니다
바다는 촘촘하니까 문양을 짜기에 좋은 무게가 필요하지요
촘촘한 문양 사이로 해묵은 맷돌 소리가 들립니다
수면 위로 회오리치는 소금 떼
꽃에 걸리지 않는다고 소금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문양을 입어보는 일은
맨몸으로도 충분하고
빛으로도 모자랍니다
마늘을 까고 널어두는 해안가에 어머니가 삽니다
눈가가 붉은 해안은 숨비기와 멀구슬의 새끼들을 키우지만
미역처럼 흐물거리는 나는 어머니를 닮아 흙색입니다
다는 바다의 문양을 입고도 비립니다
흙 맛이 나는 물고기들은 멀리 떠나 삽니까
입이 짠 나는 부르튼 물방울을 불고
감기지 않은 눈꺼풀로 꿈꿉니다
나는 꽃이 아닙니다
파도가 쥐어박고 눈발이 밀어내는 수평선에 걸린 어머니의 열매
종자로 남겨진 섬과 같은 낱말입니다
뭍에서 뭍으로 횡단하는 바람에
축축이 젖어 녹이 슬어야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소금기는 바다에 좋습니다
오래 살아도 꺾이지 않는 무게로 여물어집니다
나는 무던히도 소금기를 먹습니다
나는 바다의 종류로 묶입니다
*계간 『제주작가』 2025년 여름호(통권 제8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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