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초록 경전
늙은 귤나무에 새순을 피울 적엔
울 엄니 관절통만큼 밤새 끙끙 거렸겠지
수십 년 늘 그렇듯이 파스 한 장 붙인 채
서둘러 걷지 못해 하늘만 우러르네
다산多産의 온갖 풍파 고관절이 부러져도
수확기 다 내어주고도 파랑새가 앉았네
등 굽은 어머니가 다시 모으는 두 손
모두가 떠난 지금 너른 품 열어 놓고
입춘녘 이파리 아래 어린 울음 듣겠지

♧ 봄의 하울링
이름 없는 잡풀 아니야
냉이 불끈 힘주고
끊어낼수록 더 단단히
정동줄 스크럼 짜며
저 깊은 뿌리의 연대
경계는 의미 없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일어설 줄 알아
돌부리에 눌리면
우회할 줄도 알아
살아갈 여린 것들의
숨소리가 뜨겁다
돌쟁이 첫발 딛듯
혁명은 예고 없다
야생의 눈빛들이
파편처럼 솟는 순간
지상의 푸른 종소리
참으로 장엄하다

♧ 아주 작은 사랑 이야기
등 돌려 티격태격
앓던 밤 시간 위로
함박눈 작은 손들
서로 포개 따뜻하다
서로가 퉁 치자하며
나붓나붓 덮는다

♧ 하얀 달
해맑은 아침하늘 열아흐레 달이 간다
있어도 없는 듯이 아직 남은 품속처럼
밤사이 침에 녹다 남은
펑 과자가 걸렸네
더 작게 점점 늦게 하현 반달 될지라도
쪼그라든 전두엽 사이, 끊어진 수실을 이어
먼 기억 끌어서 오네
삐뚤삐뚤 시침하며
밤낮 없는 걸음걸음 소리 낸 적 없지만
다시 들 희망으로 녹아내리는 한 생에
저 하늘 펑 과자 하나
백치처럼 웃고 있네

♧ 겨울 묘비명
아무도 거두지 않아
속엣 말은 못했네
다 말라 비튼 탯줄
그 마저 놓지 못해
미약한 심박동 소리가
살아 갈 이유였네
한 생이 남루하여
남은 것은 봉서 한 통
유언 같은 내력의 씨
뜻이야 알건 말건
의연히 늙은 호박이
발원 몇 줄 남겼네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목언예원, 2025)에서
*사진 : 자주색달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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