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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의 시조(2)

by 김창집1 2025. 8. 7.

 

 

초록 경전

 

 

늙은 귤나무에 새순을 피울 적엔

울 엄니 관절통만큼 밤새 끙끙 거렸겠지

수십 년 늘 그렇듯이 파스 한 장 붙인 채

 

서둘러 걷지 못해 하늘만 우러르네

다산多産의 온갖 풍파 고관절이 부러져도

수확기 다 내어주고도 파랑새가 앉았네

 

등 굽은 어머니가 다시 모으는 두 손

모두가 떠난 지금 너른 품 열어 놓고

입춘녘 이파리 아래 어린 울음 듣겠지

 

 


 

봄의 하울링

 

 

이름 없는 잡풀 아니야

냉이 불끈 힘주고

끊어낼수록 더 단단히

정동줄 스크럼 짜며

저 깊은 뿌리의 연대

경계는 의미 없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일어설 줄 알아

돌부리에 눌리면

우회할 줄도 알아

살아갈 여린 것들의

숨소리가 뜨겁다

 

돌쟁이 첫발 딛듯

혁명은 예고 없다

야생의 눈빛들이

파편처럼 솟는 순간

지상의 푸른 종소리

참으로 장엄하다

 

 


 

아주 작은 사랑 이야기

 

 

등 돌려 티격태격

앓던 밤 시간 위로

 

함박눈 작은 손들

서로 포개 따뜻하다

 

서로가 퉁 치자하며

나붓나붓 덮는다

 

 


 

하얀 달

 

 

해맑은 아침하늘 열아흐레 달이 간다

있어도 없는 듯이 아직 남은 품속처럼

밤사이 침에 녹다 남은

펑 과자가 걸렸네

 

더 작게 점점 늦게 하현 반달 될지라도

쪼그라든 전두엽 사이, 끊어진 수실을 이어

먼 기억 끌어서 오네

삐뚤삐뚤 시침하며

 

밤낮 없는 걸음걸음 소리 낸 적 없지만

다시 들 희망으로 녹아내리는 한 생에

저 하늘 펑 과자 하나

백치처럼 웃고 있네

 

 

 

겨울 묘비명

     

 

아무도 거두지 않아

속엣 말은 못했네

 

다 말라 비튼 탯줄

그 마저 놓지 못해

 

미약한 심박동 소리가

살아 갈 이유였네

 

한 생이 남루하여

남은 것은 봉서 한 통

 

유언 같은 내력의 씨

뜻이야 알건 말건

 

의연히 늙은 호박이

발원 몇 줄 남겼네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목언예원, 2025)에서 

                         *사진 : 자주색달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