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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의 시(9)

by 김창집1 2025. 8. 20.

 

 

제국의 섬

 

 

모든 걸 걸어야만 지킬 수 있었다는

폭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 제국의 섬

외래종 굴러온 돌 들 사람들을 밀쳐냈지

 

말 다르고 콧대 높은 봉주르bonjour 메흐시merci

든든한 뒷배 믿고 화산섬 헤집던 때

ᄉᆞ나이 장두 이재수

미완의 삶 살았어라

 

 


 

 

이젤과 바다

 

 

1.

캔버스 올려놓는 삼각의 의식인가

수평선에 등 보이는 이젤의 부동자세

화가가 끌어안는 바다

꼿꼿이 품고 있다

 

짠내 나는 물감으로 덧칠하는 보목포구

해풍을 마다 않는 고목의 근성으로

구도를 바꿔가면서

물결도 뒤집는다

 

2.

바람 찬 들판에서 울부짖는 풀꽃들을

받치고 견뎌야 하는 피치 못할 삶이어도

나더러 기대라면서

경사지는 너라는 사람

 

 

 

 

올해의 운세

 

 

1월엔 소한 무렵 주린 삭풍 난무한다

온몸에 맺혀 있는 못된 것들 일려 죽여라

이때를 놓치는 날엔 죽도 밥도 안 된다

 

2월엔 언 강 모퉁이 버드나무 아래 있겠다

손깍지 끼고 같이 얼어 죽어도 좋을 이와

이 땅에 이끼로 누워도 아니 설운 나날이다

 

3월엔 그대 들녘에 들숨 같은 바람이 분다

신열 앓는 땅 뚫고 핀 복수초 꽃잎에 겨워

온몸이 해빙된 뒤에 꽃비가 내리겠다

 

4월엔 앙가슴에 회오리가 일겠다

들꽃들 난투극에 난장이 된 들녘에서

죽어라 애쓰지 말고 거송의 그늘로 가라

 

5월엔 돈 때문에 멀어진 친구 만난다

복리로 계산하는 시절이니 모두 털고

갚을 건 갚도록 하라 먹고살기 좋은 시절

 

6월엔 계란노른자 괜스레 당길 거다

해마다 뜨거워지는 프라이팬 속 태양 같은

꼭 집어 말을 하자면 정열이 널 휘감겠다

 

7월엔 안 믿던 말 속는 셈 치고 믿게 된다

물 가까이 가지 마라 널 물로 보는 수가 있다

조금씩 단단해지는 널 용서할 사람 없진 않다

 

8월엔 가려움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궂은 것 악한 것들이 살갗에 그물 던진 후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단칼에 그걸 자르라

 

9월엔 날이 선 칼 머리맡에 두게 된다

칼능선 이린 억새가 바람 삼킨 비웃음으로

잠결 속 비린 변명 같은 네 잠꼬대 흉보지 않게

 

10월엔 오래된 시집 서너 권 손에 쥔다

윗부분 툭툭 털다 먼지가 면박 주거든

맨 뒤에 실려 있는 시 낮이 익다둘러대라

 

11월엔 사방 천지와 글이 붉게 물든다

성숙한 억새 잎의 붉은빛으로 쓰리라

네 삶이 맞춤법이 된 시 장르의 자서전을

 

12월엔 고칠 것 지워야 할 것 숱하다

임박한 원고 마감일, 그딴 거 없다 치고

한바탕 난리 굿판을 펼쳐라 시마詩魔처럼

 

 


 

천남성을 바라보며

 

 

토정*도 백록담에 세 번 올라 보았다던

남도 땅 움켜쥔 독종 잡풀 사이 노인성

왕이메** 속살 비집자 붉은 유혹 손 내민다

 

장희빈의 모진 삶도 사태처럼 덮쳤던

풍랑 속 조선 마비시킨 천남성 열매와 뿌리

땅에서 솟아난 뭇별 무안한지 알몸이 붉다

 

옹이 박힌 숲, 독 품은 야생의 트랜스젠더

오름 허리 대상포진 아무는 제주섬에

찬 겨울 칼바람 게워 낸 변산바람꽃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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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왕이메오름.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문학의 전당,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