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국의 섬
모든 걸 걸어야만 지킬 수 있었다는
폭풍이 몰아치던 20세기 초 제국의 섬
외래종 굴러온 돌 들 사람들을 밀쳐냈지
말 다르고 콧대 높은 봉주르bonjour 메흐시merci
든든한 뒷배 믿고 화산섬 헤집던 때
ᄉᆞ나이 장두 이재수
미완의 삶 살았어라

♧ 이젤과 바다
1.
캔버스 올려놓는 삼각의 의식인가
수평선에 등 보이는 이젤의 부동자세
화가가 끌어안는 바다
꼿꼿이 품고 있다
짠내 나는 물감으로 덧칠하는 보목포구
해풍을 마다 않는 고목의 근성으로
구도를 바꿔가면서
물결도 뒤집는다
2.
바람 찬 들판에서 울부짖는 풀꽃들을
받치고 견뎌야 하는 피치 못할 삶이어도
나더러 기대라면서
경사지는 너라는 사람

♧ 올해의 운세
1월엔 소한 무렵 주린 삭풍 난무한다
온몸에 맺혀 있는 못된 것들 일려 죽여라
이때를 놓치는 날엔 죽도 밥도 안 된다
2월엔 언 강 모퉁이 버드나무 아래 있겠다
손깍지 끼고 같이 얼어 죽어도 좋을 이와
이 땅에 이끼로 누워도 아니 설운 나날이다
3월엔 그대 들녘에 들숨 같은 바람이 분다
신열 앓는 땅 뚫고 핀 복수초 꽃잎에 겨워
온몸이 해빙된 뒤에 꽃비가 내리겠다
4월엔 앙가슴에 회오리가 일겠다
들꽃들 난투극에 난장이 된 들녘에서
죽어라 애쓰지 말고 거송의 그늘로 가라
5월엔 돈 때문에 멀어진 친구 만난다
복리로 계산하는 시절이니 모두 털고
갚을 건 갚도록 하라 먹고살기 좋은 시절
6월엔 계란노른자 괜스레 당길 거다
해마다 뜨거워지는 프라이팬 속 태양 같은
꼭 집어 말을 하자면 정열이 널 휘감겠다
7월엔 안 믿던 말 속는 셈 치고 믿게 된다
물 가까이 가지 마라 널 물로 보는 수가 있다
조금씩 단단해지는 널 용서할 사람 없진 않다
8월엔 가려움이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궂은 것 악한 것들이 살갗에 그물 던진 후
한눈을 팔고 있을 때 단칼에 그걸 자르라
9월엔 날이 선 칼 머리맡에 두게 된다
칼능선 이린 억새가 바람 삼킨 비웃음으로
잠결 속 비린 변명 같은 네 잠꼬대 흉보지 않게
10월엔 오래된 시집 서너 권 손에 쥔다
윗부분 툭툭 털다 먼지가 면박 주거든
맨 뒤에 실려 있는 시 낮이 익다둘러대라
11월엔 사방 천지와 글이 붉게 물든다
성숙한 억새 잎의 붉은빛으로 쓰리라
네 삶이 맞춤법이 된 시 장르의 자서전을
12월엔 고칠 것 지워야 할 것 숱하다
임박한 원고 마감일, 그딴 거 없다 치고
한바탕 난리 굿판을 펼쳐라 시마詩魔처럼

♧ 천남성을 바라보며
토정*도 백록담에 세 번 올라 보았다던
남도 땅 움켜쥔 독종 잡풀 사이 노인성
왕이메** 속살 비집자 붉은 유혹 손 내민다
장희빈의 모진 삶도 사태처럼 덮쳤던
풍랑 속 조선 마비시킨 천남성 열매와 뿌리
땅에서 솟아난 뭇별 무안한지 알몸이 붉다
옹이 박힌 숲, 독 품은 야생의 트랜스젠더
오름 허리 대상포진 아무는 제주섬에
찬 겨울 칼바람 게워 낸 변산바람꽃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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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 이지함.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왕이메오름.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문학의 전당,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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