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탈출기 – 김성중
앤디*,
태평양 바닷가
파란 바닷물 넘실대는
지와타네호로 갈까?
앤디,
20년 동안
자유를 찾으려고
억울함을 풀려고
참고 또 참았지.
앤디,
무서움은 너의 의지
피가로의 결혼 편지이중창을 틀고
미녀의 사진으로 위장하고
작은 망치 하나로
두터운 감옥 벽을 뚫었지.
앤디,
너의 소망은
거짓과 위선과 음모를 벗어나
바다의 음악을 듣는 자유였어.
---
*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누명을 쓰고 쇼생크 교도소에 갇혔다가 탈옥한 은행원 앤디 듀프레인.

♧ 더하기 없는 어제 그리고 오늘 - 김정옥
너도 없고 엄마도 없는
어제 그리고 오늘, 내일
빼기로 비어 가는 나날
너랑 가던 식당과 카페를 빼고
엄마랑 갔던 공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갈 곳 많던 내 고향 산천에
갈 수 있는 장소가 없다
더할 수 있는 얼굴 하나 없이
너랑 웃음꽃 피우던 창가 자리가
퇴색해 가는 그림처럼
먼지만 쌓여 간다
엄마가 찾기 쉽게 빨간 옷을 입은 몸으로
그냥 펑퍼짐하게 앉아만 있다
다섯 살이 다 되도록
아직 신생아 티를 벗지 못한 채
앉은 자리에 덩그러니

♧ 와디 – 김혜천
쩍쩍 갈라진 건조한 바닥을 지나
초록이 숨어 있는 숲에 닿으면
온몸 담글 수 있는 푸르디푸른
와디
결핍의 등을 타고 지구별에 떨어진 청개구리
어디로 튀어야 물 댄 논에 닿을까
울어 댈수록 튀어나오는 눈
부드럽고 소박한 향기 있는 물
변신의 능한 보호색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
도로를 횡단하여
멀리 가기 위해서 손잡을 줄 아는 몽상가
개구리 합창이 고요를 깨운다
까만 밤 합창으로 우주를 흔들면
비가 내리고
총총거리던 별들마저 쏟아져 몸을 담그는

♧ 숙명 – 나병춘
나의 말은
나비 날개에 실려 날아간다
어느 꽃에 앉을까
살그머니 내다본다
개망초 꽃에 앉았다
노랑꽃창포에 앉았다
갓 피어난 함박꽃에게로 날아간다
너훌너훌 꽃향기 꿀이 되어
꽃구름 속으로 비상한다
나의 말은 바람이 되고 싶었을까
구름이나 안개가 되고 싶었을까
안개는 햇살이 되어
시냇가에 졸졸 흐르다
문득, 꽃잎으로 흩날리더니
나뭇잎 배 타고 날아간다
나의 말은 흩어지고
또 흩어지다
나비가 되고 바람이 되고
회오리 구름 되어 동동
노을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진다는 것
나의 언어의 숙명이다
어느 꽃으로 피어날까
혹은 어느 별자리로
어느 느낌표로?

♧ 이팝꽃 지는 마을에서 – 남대희
꽃은 저 홀로
먼 산을 데려오고
꽃그늘 아래서
그리움을 본다
꽃 흐드러진
고요한 마을 어귀
피었다 지는 일이
이토록 순한 슬픔인 줄
꽃은 조용하고
햇살도 숨죽이는
떨어지는 꽃잎 위로
작은 새가 날아오를 때
꽃은 제 그림자를
가만히 내려놓는다
지금은 누구라도
잠시 흰 바람으로 머물러도 좋겠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마을의 계절이
하얗게 흔들리고 있다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 제446호)에서
*사진 : 붉은사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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