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색 – 신호철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수천 수만의 펜톤 칼라로도 설명할 수 없지
꽃의 색, 잎의 색, 하늘의 색,
바다의 색, 모두 사람들의 색 모두
오랜 시간을 인내한 후 가지게 된다는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 볼 때
나의 색이 아닌 당신의 색으로 보여진다는
비로소 당신의 삶이, 오래 견디어 낸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슬픔에도 없는 이별의 공식을
당신의 색으로 지울 수 있다는

♧ 시대의 무관심의 변 – 유명선
익명의 소시민으로 사는 거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아서
일정량 이상은 버거워
언제나 시대는 역사적인 거고
들여다보면 무의미한 존재는 없다잖아
조용하고 사적이며 일상에 충실하기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게 답이야
(그 자연을 무참히 파괴하는 시간들은?)
어차피 피조물들의 세상이라
공감 능력까지도 구분되는 시대에
무엇에 열광한다는 것은 과거의 잔재
우리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새로운 소식을 소비할 뿐
계절만이 영속적인 거 아니겠어?
피로한 상상력 원치 않아
어차피 세상은 연민을 느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지
그래도 봄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
꽃구경 가게

♧ 밤그네 – 유정남
밤의 놀이터에
그네 타는
실루엣
하나
하루를 밀고 온 옷차림 분명한데
더 밀어야 할 것이 있는지
천천히 어둠을 밀어내고 있다
놀이도 안락도 모른 채
공중에서
흔들리고 있다
콘크리트 숲에는
꺼지지 못하는 별
종일 쏘다니다 집을 잃어버린 사람이
허공 그네를 찾아오고
물을 다 마실 동안
훔쳐보는
유리창의 시간
바람도 없는 흔들림에
몸을 맡긴 사람은
달까지 갔다 돌아오곤 한다
졸고 있는 풍향계
공기가 부풀어 오른다
야간 경비원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밀며 지나간다

♧ 모기장 고쳐 달기 – 이범철
때로 슬픔이
감자처럼 알이 굵어서
촘촘한 모기장을 통해서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기장을 닫으면 어둠도
그 올에 걸려 창밖에 쌓이고
내 안엔 뽀안 안개만 피었으면 좋겠어
어떤 다족류처럼 밖에서
기웃 기웃대다 몸에 붙은 발들 일제히 돌려
내게서 나가 주지 않을래
그렇게 겨울 떠나게 되면 봄이
좀 길어지겠지
두꺼운 추위의 겨울바람들도 모기장 밖에서 떨다가
되돌아가고 있어 모기들처럼,
이제 고것들 창문 아래 우수수 떨어지면 좋겠어
잎 고운 빗자루 들고 아침에 나가
밤새 머리맡에 쏟아진 못난 생각 쓸어 담듯
어두운 바람의 알갱이들 쓸어 담는 날이
내일이었으면 좋겠어
때로 시간이 모기장 같았으면 좋겠어

♧ 백담사 – 이학균
단지 작은 나룻배가 되겠다는
소소한 만해卍海의 집에
잠깐 왔다 간 일해日海의 발자국이
화엄실 댓돌 위에 어지럽다
만해도 일해도 모두 가고 없는 백담계곡
오며가며 들른 사람들의 돌멩이들이 쌓여 기도가 되었다
세워지고 불타고
세워지고 불타기를 몇 번
그럴 때마다 절 이름에 죄명 덮어
이름 바꾸기를 또 몇 번
가끔 기구한 인생도 있고 아프고 슬픈 인생도 있지
그런 생이 나쁜 건 아니지 잘못된 것도 아니야
백담사는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월간 『우리詩』 8월호(통권 제446호)에서
*사진 : 히말라야 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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