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안의 난파선 – 김병택
난파된 여객선이 예인선에 이끌려 입항한다는
소문이 어촌 사람들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물고기 움직임을 주시하던 우리는 낚싯대를
거두어 일어서며 두 시간 뒤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삼총사로 불리는 우리가 난파된 여객선에
민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면, 우리는 여객선을 타고
미래를 키워줄 도시로 떠날 예정이었다
원동기는 고장 났고, 돛대는 크게 부러졌으며
배수설비는 곳곳마다 망가져 있었다
선실 밖에서 여객선의 접안을 기다리는
이십여 명의 구들이 저마다 손으로
마중 나온 가족에게 생환의 신호를 보냈다
뱃전에 부딪히는 물결소리가
마치 꿈속의 빗소리처럼 들렸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고
갑판에는 키 큰 중년남자가 서 있었다
난파선의 침몰을 막아낸 선장이었다
물결과 벌이는 사투를 마다했다면
승객들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었을 터 였다
신중하게 도시로 나가서 노력한 끝에
성공의 화원을 꾸미려고 했던 계획을 떠올리며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순식간에 돌아보았다
정신은 아무렇게 엮은 사슬처럼 허약했고
의지는 많이 꺾였으며, 목표는 약간 희미했다
우리는 각자 오랫동안 간직했던 난파선을
하나둘씩 몸 밖 먼 곳으로 내쫓기 시작했다

♧ 왜 그런 다짐을 했는지 - 김수열
첫 시집 내고 들뜬 마음에 선생님께 보내드렸지
얼마 지나 우연한 자리에서 선생님을 뵙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
- 제 시집, 읽어 보셨는지요?
- ……자네가, 누구더라?
그 자리를 조용히 빠져나와 무작정 달렸지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럽던지……
그때 다짐했어
나도 큰 시인이 되겠다는 거
내게 보내주는 모든 시집을 읽겠다는 거
시인의 이름도 다 기억하겠다는 거
처음엔 정말 노력했어
열심히 읽었고 가능하면 연락도 했고
그땐 그랬는데, 근데 지금은 그게 안 돼
나이 들이서 그런가
미안하기도 하고, 왜 그런 다짐을 했는지
후회스럽기도 하고

♧ 배롱나무 군락지에서 – 김순선
배시시 웃음을 머금은
비바리들이 석양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연분홍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소나무 가지 끝에 앉은
쏙독새가
쏙독쏙독
배롱나무 마음을 훔치려 한다
동네 오빠 같은
까마귀 서너 마리가
아악 아악
우리 동네 비바리 넘보지 말라고
낮은 비행을 한다
굴렁지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던 배롱나무
아니우다게 아니우다게
더욱 얼굴을 붉히고 있다

♧ 서대문 형무소 – 김항신
는개비 추적대는 아침
끌리는 걸음은 녹록치 않았다
액자 속 희미한 불빛들의 아우성
화엄의 길로 걸어간 그들 영접하는
시간
일면식 없는 역사 속으로 스며든
나는
왜!
어떤 생각으로 셔터를 누를까
모르는 의식 속으로
섬뜩한 사형장 올가미는
다시
지옥으로
날려
의식으로 이행한다
나는 왜! 셔터를 눌러댔지?
주어진
시간
허용은
발걸음이 바쁘다
여울하고 아픈 흔적들에
파노라마 울어댈 때,
허우적대는 나의 삭신이
질질 끌어야 했던 것은
그들이 달라붙은 고통이었을까
살 거죽 입은
신경들이 서러움에 우는 시간
이들을 왜! 나는 짊어지고 가고 있는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의식
다시 이런 비극, 후손들에
없길 염원해 보며
짜인 여정에 몸을 싣는다
---
*제주작가회의 ‘뭍으로 떠나는 4•3 기행’에서.

♧ 워프 – 오광석
삼양에서 냉동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식당 창밖을 보니
하안 존재들이 내려오고 있니
어디서 이 세계로 왔을까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순백의 별들
육백 광년 너머
케플러 22-b 얼음 행성
순수한 물의 정령들이
워프게이트를 열고 넘어온 걸까
남은 소주를 털어 먹고
외계의 이주민들을 맞으러 간다
투명한 날개를 지닌 당신들은
단 하루만 이 세계를 살아가더라도
슬퍼하지 말기를
먹고사는 것도 힘든 공간
돈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더 악을 쓰고
정치는 억압을 앞세워
하루도 버거운 세상
깨끗이 정화해 주기를
술기운에 외투가 하얗도록
팔 벌려 기다리는데
같이 거리에 나선 친구들은
춥다며 나를 잡아끈다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통권제8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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