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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의 시(7)

by 김창집1 2025. 8. 31.

 

 

내가 사랑한 여자

 

 

흐르는 물이었다

바람이 불면 잔물결 지며

흐르지 않는 듯

얕게 흐르는 물이 깊었다

슬픈 날에는 풀 같았다

는개 풀풀 풀리는 날

저만 줄줄 내리고 있었다

한 시공을 숨 쉬면서

조금도 특별하지 않게

늘 그 자리에 있을 터,

물처럼 훌쩍 떠나서

내게 단 하나뿐인 여자가 되었다

텃밭을 매면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노래라야 사공의 뱃노래지만)

TV 연속극을 보면서 웃다가 울다가

멜로물의 주인공이고 싶은 여자,

내 첫사랑 뒤꼍에서 외로운 여자였다

아무래도 나는 도공이 깨어서 버린 실패작,

어린 적 아버지처럼 무정하고 서툴렀다.

개가 달을 쳐다보는 무미(無味), 그런 나를

그녀는 애초에 포기하였을 터

나도 안다, 어쩌다

술 한 잔에 물을 타서 사랑해!” 하면

무슨 농약 먹읍대강?”* 하면서도

분명 싫지 않은 표정이던 것을.

내의 하나도 찾아 입지 못하는 나를

나 어서불문 어떵 살코.** 걱정하던 여자

외간남자 같던 내가 전부였던 여자

눈을 뜨자 그녀는 아무 데도 없었다.

, 나는 그녀의 차꼬에 매인 죄수,

혼자 떠 흐르는 무인도

갈매기의 울음소리로 산다

영영 되돌릴 수 없는 세월에

하얗게 바래고 풍화된 사랑,

물로 흐른 세월이 먹보다 진하다

가슴팍에 박현 돌멩이, 그녀는

치유를 거부하는 통증으로

내가 사랑한 여자가 되었다

물같이 흘러서, 피 같이

나를 흐르는 여자가 되었다.

 

---

* 무슨 농약 먹읍대강? : (제주어) 무슨 농약 마셨나?

* 나 어서불문 어떵 살코 : (제주어) 내가 없으면 어찌 살까.

 

 


 

아내의 창

 

 

종일 누워 지내는 아내

거실 소파에 앉아 멀거니 창밖을 본다

그녀의 텃밭과 감나무와 건물 사이로 좁다랗게 보이는

가로수와 신작로를 내닫는 차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들판, 그 너머에 먼 산과 하늘, 그녀의 풍경이다

눈을 감으면 영영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석상으로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의 아득한 곳을 보고 있는 것일까,

행복한 소녀가 날아다니는 새가 되었을까,

창을 열면 온갖 새들이 날아와 노래 부르는

그녀의 오래된 풍경을 닫으려는 것일까

 

아내의 오래된 간경화

원인도 모르는 제 그녀의 피는

어디론가 줄곧 새어나가고, 그때마다

간성혼수상태로 119로 실려 가기를 세 번,

이제는 차라리 평안한 얼굴이다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저 혼자 냄비 바닥을 긁고 있을

막내가 놓아주지 않는지

소리 내어 세 번이나 부르더니

그날 오후 응급실로 이송되고,

이틀 후 그의 나라로 떠났다

엄마, 엄마!”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창문의 커튼을 가만히 내렸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하나님이 그녀를 안으셨다.

 

 


 

어디나 가득하다

 

 

아내를 가족 묘원에 누이고 왔다.

한 걸음도 안 되는 길이 그렇게 멀었다.

아이들은 제 사는 곳으로 가고

할 말이라도 있는 듯이 아내는

체경 앞 사진틀에 앉아서 나를 보며 웃는데

나는 무엇이 이렇게 미안하고 허한 것인가

 

여전히 이 방 저 방으로 꼼지락대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아내

이녁 방이라도 ᄒᆞ끔 치왕 앉집서.”*

방을 훔치며 구시렁댈 것도 같은데

이부자리만 가지런히 펴놓고 어딜 갔나

 

아내는 유난히 국화꽃을 좋아했다

내가 국화 삽목법을 배워서

작은 뜰에 국화가 만발하였을 때

아내는 가을 내내 행복하였다.

올해도 국회는 푸르게 자라는데

물도 안 주고 어디로 ᄆᆞ슬* 갔나

 

아내는 가고 없는데

아직도 나는 이별하지 못하고 있다

체경 앞의 아내와 날마다 눈을 맞추며.

각방쓰기 이십 년에 아내의 침대에서

아내의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내 안에 가득하다.

 

---

*이녁 방이라도 ᄒᆞ끔 치왕 앉집서 : (제주어) 자기 방이라도 좀 치워서 앉아요.

*ᄆᆞ슬 : (제주어) 마실, 나들이.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푸른생각,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