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월을 읽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풀리지 않는 문제 같던,
균형 잡아 저울질하던 나무들의 무장 해제
세 못 준
빈 등지만의
풀지 못한 화두 같다
나목 사이 닿을 듯 말 듯 단풍잎 더욱 붉고
마주한 눈빛조차 늘 그만큼 거리에서
불사른
화려한 죄목,
길은 점점 지워지고
모두 다 비워서야 진정으로 길을 찾네
남은 잎 팔랑거리는 엔딩크레딧 장면위로
11월
행간을 읽는다
의미는 묻지 않았다

♧ 가지 않는 길
숨겨둔 일기장처럼 잊어버린 시간이야
스텐트 시술에 빼앗긴 막혀버린 혈관이야
폐경기 훨씬 지나 온, 혼자 늙는 아쉬움이야
불현듯 모함에 걸린 유배의 시간이야
쭉 뻗은 대로大路 아래 역사의 상흔이야
오일육 아리랑고개 꼬불꼬불 추억이야

♧ 압축풀기
서랍장 맨 아래서
북은 시간 풀려오네
올 끊긴 ‘스위트 홈’
까마득한 녹의홍상
기억력, 암호 없어도
천연덕스럽게 나온다
흑백의 저장소엔 포토샵도 가능한지
추억은 앞뒤 없이 엉킨 실 풀리듯이
구순의 상기된 시간 흩어졌다 모였다…
한 생애 살아온 길이
삼베처럼 거칠어도
남은 앙금 선택삭제,
웃자란 행복만 있네
극세사 이불 귀퉁이
잘라내기 하고 있다

♧ 꽃수세미 심리학
산다는 게 수행이라면 득도하고도 남겠네
쿨 한척 설거지해도 마음 한쪽 더부룩
맨손에
꽃수세미는
거품 물고 멈췄어
비혼주의 딸들에게 손뼉을 쳐야 하나
신세대 며느리는 종種이 다른 족속이지
낀 세대
생존의 반란
주체 못할 불꽃은 튀어
밥 한술로 삼켜보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살아나는 그 아픈 한마디는
지금껏
뽀득뽀득 닦아
시가 되고 있었어

♧ 에로티시즘에 대한 물음
-클림트 ‘키스’ 앞에서
그대 사랑은 무엇으로 재나요?
사랑의 단위는 무게 인가요 부피 인가요
옷가지 금박에 눌린, 사랑의 증표인가요
진심은 꼭 재어주세요 그 표정은 뭔가요
벼랑 끝 움켜잡은 발부리의 힘을 봐요
서로 꽉 붙들어 있어도 두려움은 뭔가요
짐짓 위선인가요 확증은 필요하겠죠
통점은 돌고 돌아요 애증의 파동인가요
빈가슴 의연해져요 따뜻한 심장 채워요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목언예원,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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