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성내*의 밤
구름에 가린 달빛 근근하게 비추는 밤
박성내 옆길을 지날 때 소리가 들렸어요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스윽스윽 끌며 따라오는 소리
발걸음 소리 크게 기자촌으로 급히 걸어도
누구 하나 내다보지 않는 이상한 밤
흐윽 소리에 뒤돌아보자
길옆 어두운 자리에 선 한 남자
아내도 아이도 잃고 홀로 배회하는 날들
구명 뚫린 기습에서 바람 소리 들려온 날들
돌아가고픈 조천리 집은 사라지고 없는지
돌고 돌아도 박성내 이 자리
헤매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변해가는 자리
거멓게 사라져가는 날들
누군가 돌아보면 나 여기 있소 부르는데
돌아보는 이마다 부르르 떨며 도망치네
붙잡고 넋두리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박성내
풀어해쳐진 머리 핏기 스민 갈증이
무서워 오돌오돌 떠는데
고개 돌려 박성내를 바라보다 스윽 사라졌어요
그만 돌아갔지 싶어 되돌아가는데
바로 오른쪽 귀 뒤 차가운 한기
소스라치며 동그랗게 눈을 떠보니
박성내를 지나는 500번 버스 뒷자리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해 있었어요
---
*제주 산지천 상류. 제주4•3 ‘자수사건’으로 150여 명이 학살된 터.

♧ 여우물* 아가씨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여우물터에 한 아가씨가 앉아 있는데
집으로 돌아가던 한 사내가 발길을 멈추고 눈을 마주치는데
아가씨 어여쁜 옷을 입고 뭐하니 깔끔한 사내 불러주길 기다리니 여우물가에 앉아 새치름한 얼굴을 하고 립스틱 없이도 짙은 입술을 하고 별 같은 눈을 가진 아가씨
길 가던 사내를 붙잡으며
오라버니 데려가주세요 나를 안고 데려가주세요 외로운 밤 홀로 몸을 비비지 말고 나를 안고 가주세요 당신의 밤을 즐겁게 지새우고 황홀한 오르가즘을 느낄 때 당신의 눈에 코에 입술에 입을 맞출게요 입술 속에 묻어놓은 송곳니를 꺼내놓을게요 당신이 지는 사이 당신의 피를 빨아드릴게요 살과 뼈를 발라 사랑할게요
사내가 두 손을 잡아끌며
아가씨 어여쁜 비바리 옷을 입고 송곳니를 감추려 오므린 입술을 하고 뭐하니 아가씨 백 년 묵은 해골에 아리따운 화장을 한 번쩍이는 눈을 가진 아가씨 너를 묶고 가서 긴긴 밤을 지새우마 아가씨 집에 사나운 사냥개는 없으니 걱정 말고 따라오렴
---
*옛날 제주도 서귀포 법환동 인근의 샘물. 백 년 묵은 여우의 설이 있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 그슨새*
산속 깊은 골에 무섭고 음습한 것들이 산대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어둑한 산마을에 산대 산마을 모두 불 질러 깊은 곶자왈 궤 속 세상까지 쫓겨갔다가 산을 내려와 아이들을 잡아간대 해 질 무렵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잡아간대 마주치면 마을 사람의 얼굴로 다가와 홀리는데 산으로 찾아 들어간 너희 아비 어미 형제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건 마물들이 잡아먹었기 때문이야 마물이 잡아먹은 가족들의 얼굴로 산에서 내려와 달콤한 말로 꾀어 산으로 데려가려거든 돌로 맞히고 죽창으로 찌르렴 무서워하지 말고 돌로 성을 쌓아 마을을 지키렴 돌로 높은 성을 쌓아 너희를 잡아가지 못하게 하렴 검은 마물들이 넘어오지 못할 만큼 돌로 성을 쌓으렴 산을 내려온 마물들이 가족의 얼굴로 죽어도 모두 불태워버리렴 우리는 낮에 찾아와 너희 곁에 있을게 마물들의 위협에서 지켜줄게 내 주젱이** 안에 희미한 검고 긴 날개를 본 적 있니 보아도 못 본 것이라야 해 음울한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를 들었니 들어도 못 들은 것이어야 해 마물이 되기 싫으면 그저 성을 쌓아 그 속에서 살아가렴
---
*제주도 전통의 악귀.
**주저리의 제주어.

♧ 환마幻魔
독감이 찾아온 날 침대에 누워 연신 오돌오돌 떨다 눈을 뜨자 거대한 절벽에 서 있었지 아래에 돌풍이 치고 올라와 휘말려 빙글빙글 돌다 어느 꽃밭에 떨어졌지 만발한 꽃들을 넋놓고 보는데 꽃감관이 나타나 서천꽃밭을 침입한 이유를 물었지 돌풍에 휘말려왔다고 하자 꽃감관이 이르길 섬의 아이가 항쟁을 끝내지 않고 이리 도망쳤느냐 하늘의 법도를 어긴 대역죄로 초열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산사람이 어찌 지옥에 가느냐며 꽃밭을 구르는데 대지가 갈라지며 솟구치는 화염들 활활 타오르는 몸을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지 나는 아니오 나는 아니오 비명을 지르다 일어나 돌아 보니 뜨거운 온돌방 바닥이네 불 꺼진 열기 가득한 어린 날 익숙한 좁은 방안 무슨 꿈인가 싶어 다시 돌아보자 사십 년 젊은 어머니가 무슨 땀을 그리 쏟아냈냐며 연신 이마를 닦아내고 있었지 하 꿈인지 환상인지 이리도 지독하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데 사내자식이 이까짓 독감 하나 이기지 못한다며 타박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지

♧ 즐거운 제삿날
이른 추위가 찾아올 적
한라산에 첫눈이 내릴 적
집에는 제사상이 차려졌다
저녁 내내 동네를 뛰어놀다
밤새 눈을 비비며
제사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쏟아지는 졸음에 앉은 채 꾸벅 졸다가
방구석에 누워 잠들고는 했다
그러다가도 음복상을 차릴 때면
그새 일어나 상 앞에 앉고는 했다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
밥 위로 올려놓는 고기산적
어른들은 눈웃음을 짓다가도
숨은 이야기로 수군대고는 했다
제삿날이 한 달에 한두 번
해 넘어갈 동안 서니 번 지나고 나면
설 떡국을 먹었다
추운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조금씩 쌓여가는 숨은 이야기들
제삿날마다 모여 앉았지만
웃는 날보다 수군대는 날들이 늘어갔다
죽음으로 살아 이어지는
가족의 역사를 들려주는 자리
모여 앉은 어른들 사이
희미하게 보이는 숨은 이야기들
다시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날들이
돌아오기까지 수십 년이 지났다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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