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효자손
밤 아홉 시면 어김없이
서울 작은놈이 알람을 울린다
혼자 사는 늙은 애비, 냄새 날까 봐,
고독사로 매스컴을 탈까 봐 걱정인 게다
“야, 이놈아! 죽을 때 되면 어련히 전화할까,
전화비 오른다.” 너스레 떨면서도 그게 고맙다
코로나 숨을 쉬면서 사람이 그립다
등이 가려울 때
아내에게 등을 돌려대면
족집게처럼 가려운 데를 긁어준다
등이 가렵지 않은데도 무장 들이댄다
내 흉계를 빤히 보면서도
“목욕 자주 헙서.” 괜한 핀잔을 얹어
구석구석 부드럽게 쓸어준다
등을 통째로 맡기고 느긋이 행복하였다
이제는 효자손이 아내를 대신한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며 벅벅 긁어대면서
눈물이 난다.

♧ 혼자 밥 먹기
김치,
밥, 국,
세모꼴로 단정히 앉아
나와 눈찔래*를 하잔다.
젓가락을 든 채
멀거니 보고 있노라면
한 술도 뜨기 전에
목에서 꺽꺽거린다.
에라,
국에다 밥 몇 술 말아서
후루룩 똑딱
숭늉이듯 마셔버린다.
그게 또 밥에게 미안해서
껌을 씹듯 잘근거리노라면
꾸르륵꾸르륵, 속에서
개수대에 물을 내린다
거울 앞에서 아내는
웃는 것일까, 우는 것일까
---
* 눈찔래 : (제주어) 소가 눈으로 겨루는 것.

♧ 샤워를 하면서
샤워 하면서
하루의 긴장을 해제한다
탄력 잃은 피부에
향긋한 비누 거품이
뽀글뽀글 타고 내릴 때
문득 그녀의 부드러움이
낱낱의 세포를 깨운다
거울 앞에서 폐기된 퇴물이
치기(稚氣)스런 개구쟁이만 같다
툭, 건드리니, “왜 그래!” 한다
‘그래 너도 있었지!’
한때 앞뒤 없이 치받던
부사리* 뿔만 같더니만
빈 주머니만 남았구나
팔공산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이치들이 소리 내어 웃는다
그리움과 슬픔과 아픔과 사랑과
비포장도로를 끌고 오면서
푸른곰팡이가 스는 시간,
그 무화의 과정의 낱낱을
지켜보리라 한다
버텨온 믿음으로, 감사함으로
---
* 부사리 : 거세하지 않은 황소

♧ 나의 첫 페이지
그때 내 나이 몇이었을까
어멍*은 밭에 갔을까
형도 누나도 학교 갔을까
잠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다
볕은 과랑과랑허고
찐 고구마 하나 손에 들고
빨가벗은 채로 골목을 나설 때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 호들갑스레
“아이고, 누구야! ᄒᆞᆫ저 강* 옷 입으라!
고냉이 조쟁이 타가불믄 어떵허잰?*"
함박같이 웃으며 지나갔다
그게 부적이라도 붙여야 하는
금단의 열매라도 되는 걸까
달랑 달랑
고양이가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일까
오늘 새벽 눈을 뜨자 떠오른
그 까마득한 이야기
허공에 낱낱이 기록된
그 첫 페이지일까
분절* 모르고 살던,
그때가 정말 행복하였다
나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
* 어멍 : (제주어) 어머니.
* ᄒᆞᆫ저 강 : (제주어) 빨리 가서.
* 고냉이 조쟁이 타가불믄 어떵허잰? : (제주어) 고양이가 자지를 물고가면 어쩌려구.
* 분절 : (제주어) 물정, 분별.

♧ 무거운 밤
무거운 밤
새도록 물레를 돌리며
무명실을 잣는 이는 누구십니까?
새벽을 깨우던 교회 종소리와
골목 어귀에서 몰래 나를 보던 반쪽 소녀와
늙은 아들이 여전히 불안한 어머니의 눈빛과
수복한 서울 거리를 께끼통*을 메고 떠돌던 아이
붕붕-, 물레 소리는 밤을 새우고
갈수록 삶은 미망(迷妄)을 헤매고
뼈도 삭는 시간에 폐기된 이야기를
각설이는 죽지도 않고 깡통을 두드린다
밤이 맞도록 그리움을 쫓다가
허위허위 새벽 산을 오른다
보광사의 예불은 떠도는 영들을 재우고
풀벌레들이 가는 계절을 아쉬워한다
산정에 서면 시원(始原)의 바람,
어둠을 걷어 올리는 바닷바람이 싸하다
저 아래 갯마을에 노곤한 불빛들이 졸기
파도는 지질 줄을 모르는데, 오늘은
해보다 먼저 해를 품으려 한다.
---
* 께끼통 : 아이스케이크를 당시에는 ‘께끼’라고 했다.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푸른생각,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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