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달빛소리수목원
수레국화 언덕이 보라로 걸어온다
한낮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나무줄기가 빛의 방향을 안을 때
봄과 여름이 만나 모세혈관을 펼치는 걸까
금목서 긴병풀꽃 인동초 개양귀비
빈혈처럼 혼자인 단어들
몇 번이나 놓쳐 버린 순간
어찌 보면 왁자한 줄거리가
오늘 헤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오는
그녀
시
시간은 그림자를 따라 걸었고
그림자는 조용한 쪽으로 간다
어떤 순간은 시간의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다시 시간이 된다
오래된 나무 곁에 지고지순 앉아 있다가 보면
달의 뿌리가 될지 모르는
뒤를 뒤척이는 게 삶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가끔 어두워졌다
아플 때마다 먼저 부르트던 계절
과거가 된 단어들은 일기장에 남아 있는지
빈 곳을 확인한다
저기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
저건 포도나무의 날개
저 또 하나는 기린 찾아가는 꿈덩어리일거야
무논마다 해가 들면
해가 여럿인 줄 알던 아이
그녀는 아직도
오백 년 된 나무쪽으로 가고만 있을 것 같아
돌아볼 일 같은 건 없는 거라고
단어들이 달려와 중간자의 어깨 툭, 칠 것 같다
초록과 연두 사이 미숙아로 태어나
5월은 여름을 향해 갈맷빛으로 여물어 간다
붉어진 저녁엔 몸 수그리고
꽃잎에 들어가 눕는다

♧ 오후의 궁리 – 지소영
- 행복 행진 열둘
색도 부피도 없는 칠월 자락 한 줌
가만히 구긴다
인기 절정의 자가 개발 매운 소스로
잘 나가는 설렁탕을 주문한다
겁 없이 신나게 들어붓고 호호호 맛짱탕이 되었다
시카니아시나마이드
클리어비우티 레티놀콜라겐
여행 매니아의 동남아 기념 선물을
나른해진 눈두덩에 얹으며
싱가폴의 귀태를 입은 넉넉한 아낙이 된다
밀라노 모닝 바가 커피봉을 흥미롭게 찢고
접힌 종이 핸들을 잔에 걸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음〜흠〜 어디서 고로코롬 특별한 향이
몽롱 이몽룡 같은지
뾰옥 눈을 감는다
올림피아 텃밭지기에게 낯선 것들이지만
맛향이 듣도 보도 못한 거라
재탕을 하면서 행복은 하모니카 소리를 낸다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목단 꽃잎 즈려 밟고 물든 발바닥
온열매트에 맞닿고
이젠 좀 쉬라고 토톡 두들긴다
오후를 깨물며
콩줄기 하늘 두루미는 크루즈에 풍덩
흔들수들 여행처럼 달작한 침샘 목을 흐른다
먼 기억 송이송이 바람을 부치고
태양의 그늘은 은근히 지고 있다

♧ 여름 숲 – 권순자
까치 지저귀는 소리
신호음 따라
숲 그늘에 작은 잎들 속살 흔들리고
나무의 귀들이 펄럭인다
잘 들어 봐
가녀린 바람 소리 사이로
속삭이는 소리
구름이 빗줄기 데리고 후다닥 달리는 소리
사라졌다가
이파리 사이로 잔가지 사이로
벌레들 소리 섞여 온다
불어오는 낮은 음악
어느 그늘이 연주하는 노래
나무들 혈관을 타고
나무의 심장 소리 흐른다
습습한 기운이 감도는 울창한 길
까치들 몇 번씩 솟구쳤다가 내려왔다가
공중그네를 탄다
나뭇잎들도 시퍼레져서
구름을 당기고 바람을 끌어안고
여름 숲에서 장단을 맞춰 춤춘다
오래된 숲은 소리를 낳고 또 낳고
빼곡한 소리들이 여름 저녁 숲길을 천천히 색칠한다
시퍼렇게 어둡게
바람이 부풀어 오르면
우듬지 위로 저녁이 달처럼 환해져서
작은 골짜기 수풀 사이로
잉잉거리는 벌레 따라 나른해져 간다
두려움 없이
잔가지들 사이를 공중제비하며
새들이 포르릉 날 때

♧ 시곗바늘 - 김기호
나는 늘 바빴고
너는 내 뒷모습만 보았지
닿을 듯
엇갈리던 시간들
속도는 달라도
같은 원을 돌고 있는데
늘 곁에 있었지만
이제서 보인다
‘아내’라는 이름

♧ 금등화 – 김나비
컥,
취한 밤 밀어 올리듯 여름을 게워 낸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뙤약볕 아래 불구덩이를 맨발로 오르는 일,
환한 아침마저
그믐밤 달동네 골방에 쪼그리고 있는
책상 위에 고인 어둠이 되고
검은 담장을 홀로 건너노라면
세상은 온통 칼의 바다
꼰지발 딛고 발돋움하는 어린 자모들이 댕강 잘리고
비켜 간 여린 줄기가 깔깔한 골목을 숨죽이며 더듬거린다
얼마나 더 걸어야 당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
당신에 이르는 길은
살 물어뜯는 벌레의 나날을 견디는 일,
지친 몸, 담에 기대 각혈을 하고
톱날 같은 잎사귀를 피해 오르던 단어의 줄기가
담장 끝에 올라 주홍빛 입을 벌리면
씨방에서 건져 낸 노란 문장이 혀가 되어 맺힌다
등을 내어 주는 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숨을 느끼는 것
담이 토닥토닥 땀을 닦아 주는데
게워진 여름,
닿을 수 없는 허공 향해 먹피 같은 속울음 삼키는데
*월간 『우리詩』 9월호(통권 제44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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