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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광석 시집 '귓속 이야기'의 시(7)

by 김창집1 2025. 9. 18.

 

 

늘 봄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바다를 바라보는 내리막길이었지

 

 전쟁놀이에 대낭 찾아다니던 봄날 웃드르 함박이굴* 골목 대낭밭에서 밑동이 불그스레한 대낭을 꺾어다 놀았지 내창에서 골개비를 잡아 대당 뾰족한 끝으로 찔러 굽기도 했지 무너져가는 돌담길 사이에 모여 앉아 잡아온 독다구리 지넹이 골개비 자랑하다 날이 저물곤 했지 해 질 무렵 도채비불 쫓다 대낭밭에서 흐윽흐윽 소리가 들릴 때야 집으로 내려가곤 했지 내려가는 동안 올라가는 아이가 없는 걸 당연하게 여겼지

 

 가로등 하나 없던 검문소 너머 마을의 흔적들 사라져가는 어린 기억들 그 자리에 솟아난 꿈들이 빌딩만큼 자라난 후에야 알아버렸지 잘라 놀던 대낭밭이 설화처럼 희미해져 가는 옛집을 지키고 있었다는 걸 무너져가던 돌담길은 옛집으로 가는 을레라는 걸 잡아온 독다구리 지넹이 골개비처럼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가던 날 일렁이는 인광만 남긴 채 비어버린 마을

 

 한동안 오르지 못한 웃드르의 자리 어느 봄날 복개된 내창 위로 아스팔트가 깔렸지 네모난 성곽 같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었지 삭막하게 돌아온 사람들 대낭도 올레도 독다구리도 골개비도 땅속 깊은 자리에 묻혀 사라진 곳 이제는 봄으로 기억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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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노형동에 있던 제주43 당시 사라진 마을.

 

 


 

오래된 유물

 

 

어떤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산에서 내려오곤 했다

 

선흘리 아이들은 오름과 굴을 놀이터 삼아 산을 오르곤 했다

산 중턱을 쏘다니며 옛 시절 유물들을 찾아헤매곤 했다

도틀굴 목시물굴 곶자왈에서

깨진 그릇과 녹슨 탄피 뼛조각을 주우면 영웅이 되어 자랑하곤 했다

서쪽 오름 위에 해가 걸릴 즈음 집으로 내려가는 아이들

놀다 만 깨진 그릇과 탄피들은 어느 구석에 박혀 잊히곤 했다

 

뜨거운 항쟁이 거대한 산이 되어 일어난 시절

산을 오른 사람들은 붉은 칼날이 되었다

활화산 같던 열기는 소개령에 막혀 식어버렸고

붉게 물들었던 산이 앙상해지자

칼날 같은 죽음들이 우수수 떨어져 엄혹한 겨울 땅속으로 묻혔다

 

산 중턱을 오가던 사람들에게 밟히고 밟혀 기억조차 희미해지던 날

굴삭기와 콘크리트로 또 한 번 산을 소개하는 자본가들

궤와 곶자왈에서 파내어져 산에서 내려오는 유물들

내일을 모르는 노동자가 되어 돌아온 아이들

그 시절 놀던 땅을 파헤쳐 다시 찾아낸 항쟁의 파편들

 

산에서 내려온 건 푸석해진 뼈의 조각들 녹은 살점들

오랜 시간이 지나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불었다

희미한 울음소리가 산기슭을 타고 내렸다

 

 

                                                    *강요배 작
 

구멍 난 다리

 

 

그녀의 다리에는

지나온 날들로 메워진 구멍이 있다

 

절뚝이는 다리로 하루를 돌아다니다

밤이 되면 억지로 구겨넣어둔 날들이

하나둘 터져 올라온다

 

구멍 난 자리

메워진 것들을 바라보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구멍 난 기억들

 

널브러진 주검들 너머

벙그물궤*에 버려진 날

긴 어둠 속에 눌러두고 온

기억의 파편들

절뚝이며 산을 내려와

절름발이가 되어버린 진실을

업고 살아온 날들

헛총 소리 들릴 때마다 돌아보면

비틀어진 채 쏘아대던

눈총의 기억들

 

날것 그대로 터져 올라와

총알이 되어 쑤시는 밤

잠들지 못하고

허벅지 무릎을 주물러 가라앉힌다

 

주물주물

밤새 다리를 주무르다

아침이 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을 맞아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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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당시 군경이 쏜 총에 다리를 맞은 부순녀 씨가 혼자 버려졌던 동굴.

 

 


 

대살

 

 

아들 대신 아버지가 죽었다

아련하게 들리는 총소리

갑선이오름을 타던 아들은

아버지 대신 살았다

 

난리가 끝나고 돌아와

버들못에서 유해를 찾아 장을 치르고

질기도록 살았다

 

혁명이니 군사정권이니 칼날 같은 세상

맨몸으로 시내 막일로 밤 없는 날들로

집도 가족도 새로 일으켜 아들들 반듯하게 키운

아버지로 살았다

 

민주화 바람에 거리로 나선 아들들

잘라내지 못한 연좌의 굴레

몰래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 대신 아버지가 죽었어

가족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해

주름투성이가 되도록 살았다

아버지가 억울하지 않을 만큼

 

대통령이 내려와 사과하는 방송을 보며

풍선처럼 빠지는 기력

하루의 반을 누워 살아갈 지경이 되었을 때

몸은 녹아내려도 기억은 점점 또렷해졌다

 

아버지가 대신 총에 맞던 그때

그런 줄도 모르고 무서워

오름으로 곶자왈로 궤 속으로

산짐승처럼 숨어

아버지 대신 살아난 그때

 

젊어지는 기억들

자꾸 죽었어야 할 날들로 되돌아갔다

걱정스레 지켜보는 아들들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주름진 손으로 꼭 잡고 말했다

나 대신 오래오래 살아줍써

 

 

                  *오광석 시집 귓속의 이야기(도서출판 북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