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구나무서기
거꾸로
보는 일로
두 눈이 맑아지고
똑바로
보는 일로
두 눈이 흐려져도
뒤집힌
이 땅의 풀잎
다시 세울
저기,
저 봄

♧ 꽃다발
박수 한번 받고서
거실 벽에
기댄
꽃
비바람 이겨냈던
맷집 좋은
시든
꽃
사람에
꺾였으면서
모른 척
안기는
꽃

♧ 포스트잇
저마다의 이름이
삭제되지 않도록
포스트잇 온몸으로
벽을 타고 오르고
우연히 생겨난 메모장,
기억을 깁고 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이제 더 쓰지 않게
거센 바람 견디고
한겨울 버텨내는
이태원 좁은 골목을
움켜쥔 저 접착력

♧ 구둣주걱
퍼즐 같은 이 도시에 들어맞지 않는 나를
뒤꿈치 추켜올려 우쭐하게 해준다
고단한 걸음걸이를
달래주는 나의 후견
온종일 딛고 걷는 땅 닳아가는 구둣발
믿고 뒤를 맡기고 쓰다가 버리라며
뒤에서 날 들어 올리는
아주 작은 포클레인

♧ 2월의 사생활 보호 구역
잔설은 절절하고 칼바람은 분주해요
겨울 끝자락에선 조급함이 입맛에 맞죠
2월은
키 작고 배고픈
스물여덟 단발머리
질펀한 결핍은 두루 나눈 까닭이라
궁한 게 아니거든요 꽁다리가 없을 뿐
공간이 비워진 만큼
충분한 그녀의
사생활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가히,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 (2) | 2025.09.22 |
|---|---|
| 강윤심 시집 '속울음으로 꽃망울 맺고'의 시(8) (0) | 2025.09.21 |
|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의 시(10) (2) | 2025.09.19 |
| 오광석 시집 '귓속 이야기'의 시(7) (1) | 2025.09.18 |
| 한희정 시조집 '립스틱 지우는 저녁'의 시조(4) (1) | 202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