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선화
여고 시절 땋은 머리 소녀로 온 친구
긴 세월
우린 언약처럼 변함없지요
어떠한 일에도 서로의 눈빛으로
먼저 느낌으로 손 내미는
웃음으로 보자기 싸매는 반평생
겨울 산모롱이 돌고 나오는
바람의 몸 지친 일상에서도
다시 옷매무새로 웃는
쌓일 듯 내리다 흩어지는 눈
수선화 꽃내음 향기 실은
겨울나그네

♧ 제주 고사리
반평생 살아가는 길
안개숲처럼
는개비 젖은 마음 품고
살고 있다
반쯤 허리 굽은 자세로
고깔모 머리 조아리고
찔레가시 덤불 헤쳐
꿩울음 울고 있다
속세에서 우지 마라
오월 끝자락
가슴 비집고 앉은
그리움
산야는 하얗게 찔레꽃
피우고 있다

♧ 소엽풍란
오지의 낭떠러지
오직 한 몸 감아오르는
젖빛 뿌리의
오르가즘
뉘를 향하여 부르는
그리운 이름인가

♧ 칸나
내리쬐는 뙤약볕에도
늘 눈시울 젖는
꽃잎
뜨거운 아스팔트 지나
어느 좁은 농사길
막걸리 한잔 걸친
농부의 오줌발에도 오롯한
네게 어느 사람은 까발리다 하여
화냥년이라 부르면 어때
어스름 녘 꽃잎 고운
누이와도 같은데
소낙비 내리치면
뒤란 장독대 먼저 와 있는
어린 시절 네가 그리 그립다

♧ 낮달과 어머니
가늘게 부는 바람
멀리멀리 가고 나면
저 하늘 낮달쯤에
어머니 계신 것 같다
온몸 은빛 화문 그리는
포플러 그늘 아래
소낙비 내리치듯
누구를 찾는 것 같은
자지러지는 매미소리
낮달을 보며
어머니!
저렇게 떼쓰고 싶어요
*강윤심 시집 『속울음으로 꽃망울 맺고』 (한그루, 2025)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의 시(2) (0) | 2025.09.23 |
|---|---|
|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 (2) | 2025.09.22 |
| 조한일 시집 '낮은말 받아쓰기'의 시(10) (0) | 2025.09.20 |
| 김영란 시집 '동백 졌다 하지 마라'의 시(10) (2) | 2025.09.19 |
| 오광석 시집 '귓속 이야기'의 시(7) (1) | 2025.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