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생활의 범람
꿈이나 꿔야지
이런 게 파도라면
숨이 차는 일이라서
등 뒤 물결로 꽂힌 사람이
갑자기 들이치는 일이라서
고통이라면 견디기라도 하지
깨진 꿈을 던진 날은
손금에도 금이 가서
손톱 밑을 찌르는 게 사랑이라서
감정선 뒤끝을 만나는
가혹한 일이라서

♧ 만다라의 체형
자신의 그늘을 그려 넣는 사람들
꿈 이후의 일이었다
깃털을 털고 날아가는 동공은 검은 색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나비의 눈꺼풀 밑에서 일어난 일이라
나는 깊은 꿈은 모른다 하였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걸어 나오는 도안 밖
늘 변하는 건, 빛깔의 체형
몸이 갇힌 원형, 착상된 물방울을 붓으로 쓸어버린 완성의 순간
문양 속 몇 겁의 주름진 잎들이 펼치는
격렬한 생사(生死)의 반경
붉은 어루러기
입을 다물었는데도 터지는 패던
버린 꽃은 늘 아까워 모래에 검은 달을 베낀다
봉인된 후생이 윤곽 없이 허물어진다
열두 달 잔금이 새겨진 상(像)이 이파리처럼 돋아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꽃잎은 선명해진 징후를 찌른다
주기가 끝난 검은 달은 깨져버린 거울 조각
채색이 빠져나간 몸은 텅 빈 내막이다

♧ 오르골
하루에도 몇 번씩 죽었다
생각나면 느리게 살아나는 사람
너를 밀어내니
내가 비좁다
살아버려라
죽음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몸마다
춤을 추며 흘러내리는
밤의 오묘한 악곡
아프고 나서야 알았지
튕겨 나간 소리를
죽은 음계 속에 갇힌 너를
꺼내줄까 말까
슬픈 구석을 믿었기는
손뼉을 지며
번져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날들을
다시 돌아가자
가장
아픈
음계로
너를 짚었으니까

♧ 달려라 에덴
아성을 두고 나왔다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지 않으면
으르렁거리지 못하는 희미해진 이빨 자국이다
아이는 식탁에서 소파로 침대로 순위를 자꾸 옮겨놓는다
힘 있는 포식자에게 먹히는 먹이사슬
씁쓸한 헛기침이 음소거된다
권위는 옮겨지며 가벼워진다
스쳐 간 곳은 모두 굳은살이 된다
누군가의 가장이라는 말에선 파스 냄새가 난다
잃어버린 건지 잊어버렸는지 모를
생활의 한 귀퉁이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치지 못하는 공회전이 숨이 가빠서
가파른 에덴을 가로질러
끝내 지키고 싶은 가슴 밑바닥
금이 간 야성, 낮은 보폭으로
비릿한 사투를 벌이는데
전투복이 보이지 않는다

♧ 엄마의 화분
오빠를 분갈이했다
오빠는 가시가 많은 까칠한 장미를 닮았다 엄마 손금마다 빛나는 오빠가 자랐다 무례한 장미는 꿈이 높았다 힘을 뺀 뾰족한 번개는 엄마를 찌르고 동공에는 장미 냄새가 번져가고 일식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를 걸러 흐린 꿈은 얼룩이 되었다 집안의 가구들이 실핏줄이 터졌다 엄마의 손금은 운명선이 길다고 했다 손톱이 계속 자라는 슬픈 가족은 슬픈 연대 같았다 오빠랑 엄마의 싸움이 끝나자
손금 바깥마다 풀이 돋아나고
*고영숙 시집 『꿈을 나눠 먹어요』 (여우난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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