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각(棄却) - 장영춘
내 삶의 정점을 찍었던 산 증거물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물건 하나
심증은 있으나 그 또한 물증이 없으니

♧ 신발 벗어 놓는 방식 – 조한일
웅덩이에 좌초된 이중섭 거리 가던 날
우측 신발 빠지자 화들짝하는 좌측 신발
한평생 동행하는 길 평행 이론 또 깨지고
걸음마다 맞추며 살아온 데칼코마니
말 못 하는 저들이 껴안을 수 있도록
이제는 벗어 놓을 땐 마주 보게 해 줘야지
수산시장 배달할 때 요양원 출근할 때
뒤축이 다 닳아서 버려지는 순간까지
나란히 있으란 숙명 순응해서 살아남고
꽃길을 걸어가도 가시에 찔리는 법
어둡고 바람 찬 길 깍지 끼고 건너게
신발을 벗어 놓을 땐 마주 보게 해 줘야지

♧ 고사리 한철 - 한희정
1
빈부귀천 고사하고 엎드려야 제대로 다
어웍밭, 가시밭에 손 모은 행자 따라
꽃모자 설문대 할망 허리 반쯤 꺾고서
2
말재주, 글재주, 돈 벌 재준 더욱 없어도
새벽길 삼천 배로 나도 한철 꼽사리다
역류성 풍경조차도 요맘때 아니고서야

♧ 의자의 연대기 - 김진숙
남문동 버스정류장엔
사람보다 의자가 많아
하고 싶은 말보다
안 듣는 척 귀 세운
흠집과 기우뚱한 생각들
두서없이 맴돌지
애당초 떠날 생각은
이미 접어 두었는지
지나가는 바람도
늙어가는 시간도
모두 다 불러들이고
귓속말을 건네지
누군가의 일생이
다녀간 자리마다
화단 가꾸는 걸
좋아하는 사람처럼
노을꽃 곱게 피우고
이별을 마중하지

♧ 창고재(創古齋)* - 김경훈
비가 오거나
바람 센 날에는
창고재로 가자
거기 쥔장
날씨 탓하며 일손 접고
낮술 음모할 터이니
제철 달래와 땅두릅이
막걸리 서너 병 반길 것이니
모란과 양귀비가
눈웃음 유혹할 것이니
술과 책 사이로
차와 커피향이 흐르고 있으니
바람은 불어
전축의 음악을 유리창에 흩뿌리니
우울한 봄비 속
허전한 심사들이여
이런 날엔
주저 없이 무턱대고
창고재로 가자
---
*창고재 : 제주 조천에 있는 김경훈 시인의 서식지 혹은 출몰지.
*계간 『제주작가』2025년 여름(통권 제8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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