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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2025 여름호의 시(완)

by 김창집1 2025. 9. 27.

 

 

기각(棄却) - 장영춘

 

 

내 삶의 정점을 찍었던 산 증거물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물건 하나

 

심증은 있으나 그 또한 물증이 없으니

 

 


 

신발 벗어 놓는 방식 조한일

 

 

웅덩이에 좌초된 이중섭 거리 가던 날

우측 신발 빠지자 화들짝하는 좌측 신발

한평생 동행하는 길 평행 이론 또 깨지고

 

걸음마다 맞추며 살아온 데칼코마니

말 못 하는 저들이 껴안을 수 있도록

이제는 벗어 놓을 땐 마주 보게 해 줘야지

 

수산시장 배달할 때 요양원 출근할 때

뒤축이 다 닳아서 버려지는 순간까지

나란히 있으란 숙명 순응해서 살아남고

 

꽃길을 걸어가도 가시에 찔리는 법

어둡고 바람 찬 길 깍지 끼고 건너게

신발을 벗어 놓을 땐 마주 보게 해 줘야지

 

 


 

고사리 한철 - 한희정

 

 

1

빈부귀천 고사하고 엎드려야 제대로 다

어웍밭, 가시밭에 손 모은 행자 따라

꽃모자 설문대 할망 허리 반쯤 꺾고서

 

2

말재주, 글재주, 돈 벌 재준 더욱 없어도

새벽길 삼천 배로 나도 한철 꼽사리다

역류성 풍경조차도 요맘때 아니고서야

 

 


 

의자의 연대기 - 김진숙

 

 

남문동 버스정류장엔

사람보다 의자가 많아

 

하고 싶은 말보다

안 듣는 척 귀 세운

 

흠집과 기우뚱한 생각들

두서없이 맴돌지

 

애당초 떠날 생각은

이미 접어 두었는지

 

지나가는 바람도

늙어가는 시간도

 

모두 다 불러들이고

귓속말을 건네지

 

누군가의 일생이

다녀간 자리마다

 

화단 가꾸는 걸

좋아하는 사람처럼

 

노을꽃 곱게 피우고

이별을 마중하지

 

 


 

창고재(創古齋)* - 김경훈

 

 

비가 오거나

바람 센 날에는

창고재로 가자

거기 쥔장

날씨 탓하며 일손 접고

낮술 음모할 터이니

제철 달래와 땅두릅이

막걸리 서너 병 반길 것이니

모란과 양귀비가

눈웃음 유혹할 것이니

술과 책 사이로

차와 커피향이 흐르고 있으니

바람은 불어

전축의 음악을 유리창에 흩뿌리니

우울한 봄비 속

허전한 심사들이여

이런 날엔

주저 없이 무턱대고

창고재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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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재 : 제주 조천에 있는 김경훈 시인의 서식지 혹은 출몰지.

 

 

                  *계간 제주작가2025년 여름(통권 제8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