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구
내 몸에 걸려 넘어진
어둠을 생각하다가
여분의 빛을 활용하거나
절망의 조각을 세공하여
한 줄의 길몽으로
다시 쓴다

♧ 알던 신이 있었다
흰 마당에서 주인을 모르는 꿈을 주웠는데
에야, 그림자 가지고 혼자 놀지 마라 깃든 태생에 혼 묻는단다
검은 천 뒤에 감쪽같이 몸을 숨겨 한참을 놀다 보니
몸살을 앓던 한 생이 쌓아놓은 소꿉 이전의 일
이 눈물 다 녹기 전에 숨바꼭질을,
날 끌어안은 게 물이었는지 불이었는지
그림자를 놓아주고 오래 슬퍼하다 보니
알아챈 뒤는 보이는 것만 시절이란다
가르마 한가운데라 무섭지만
푸른 명이 전생으로 번질까 창문을 닫아주는데
남은 이별도 빼앗기게 될까 봐
나는 아직껏 주먹을 꼭 쥐고 있었구나

♧ 텀블러의 바다
죽음이 도서관 책장 위에 놓여 있다
창문 밖 금이 없는 하늘과 바다를 휘저으면 어지러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공후(箜篌)의 노랫소리
놀란 물빛 그림자 한 마리 날뛰는 파도가 머뭇거린다
희끄무레한 이승과 저승의 몇 걸음, 들물과 날물을 풀어헤치는 백발의 사내
식지 않은 가슴 위에 물결선을 긋는다
전생의 비늘 하나 들추면 지루한 복도 끝이 풀어놓은 아득한 경계, 물살을 읽는 물고기 떼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진 잠꼬대가 쏟아진다
걸음을 옮기시라, 여기보다 깊은 바다는 없으니
텀블러 안이 출렁이는 순간, 책상 모서리 쪽으로 주룩 쏟아지는 하늘
아슬한 물살로 춤을 추던 아가미가 끝내 페이지를 건넌다 흔들리는 행간마다 흰 포말로 일렁이다 사그라드는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서가를 빠져나와 텀블러를 기울여
물결을 따르는 페이지가 있다

♧ 온실학개론
그랬잖아, 썩어버리는 게
차라리 상책이라고
피가 돌지 않는 교감이란 비닐의 질감이라고
날마다 가꾸었는데 허공으로 깊은 가지들
나이테는 오래 맴돌던 유배의 시간
어제 죽은 사랑을 벽에 걸어두면 줄기마다 검은 그늘이 묻어나오는데
잠깐 스친 손끝마다 재배되는
우리
쪽빛 상처에 눈이 먼 식물들의 목자

♧ 주문하신 눈사람 나왔습니다
폭설은 위험할 때 가장 아름답다
글썽거리던 생이 미리 그려놓은 균열이라면
짧은 목은 그 징후
횡단하는 눈과 눈 사이 친절한 오늘이 미끄러진다
기다리던 첫눈은
너에게로 기우는 마지막 사투
넘실거리는 머그잔에 침몰하는 너의 취약함
단 한 번을 사는 견고한 계절을
연약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이 슬프다
홀로 선 피켓처럼 간신히
너를 버틴다
나를 버틴다
흐린 겨울이 지나는 내륙엔 눈보라
탄성들이 이 시린 역광으로 흩어진다
금이 간 포옹
녹아내리는 최초의 입맞춤
눈사람이 젖은 생을 끌고 얼룩 쪽으로 걸어간다
*고영숙 시집 『꿈을 나눠 먹어요』 (여우난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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