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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의 시(3)

by 김창집1 2023. 11. 26.

 

 

프러포즈

 

 

태초부터 우리가 당신 사이였나요

신이 머무르는 공간을 당이라 하고

원초적 당의 주인은 신이었으니까요

 

할망당은 할망신

하르방당은 하르방신

어떤 사람 어떤 시간이 당신으로 맺어져

제주 섬 은밀한 곳곳 푸르른 이끼처럼

 

길은 끊어져도

생이 남아 있다면

당을 위한 신의 마음 신을 품은 당의 마음

하가리 할망당 앞에서

우리 당신 할래요?

 

 

 

 

이대 족대 왕대 그리고 그대

 

 

그대와 살림 궁합은 그때가 좋았었네

 

여한 없이 쪼개며 갓 패랭이 돼주고

등에 지고 싶으면 질구덕

들고 싶으면 들름구덕

허리 찰용이면 ᄎᆞᆯ구덕

나물 담아 ᄉᆞᆼ키구덕

애 키울 땐 애기구덕

빨래할 땐 서답구덕

나들이 갈 땐 ᄀᆞ는대구덕

뚜껑 열어 짝 맞추면 차롱이라

밥 담아 밥차롱

떡 담아 떡차롱

도시락은 동그량착

낱알 고를 땐 얼멩이

마당 쓸 땐 비차락

물도 새고 바람도 새고 물도 품고 바람도 품던

대나무 곧게 결은 그 한때 세간살이

폭죽소리 총소리 뒤엉킨 근대 지나

 

그대가 멀어진 만큼 나는 돈이 좋았네

 

 

 

 

호모사피엔스 다리 설계도

 

 

누가 두 다리로 선다고 하는지 몰라

 

잇속에 눈먼 잔꾀돌이 구늉다리

가나오나 징징대며 눈물 파는 아연다리

사방팔방 오지랖 제 짐에 치인 맥진다리

넘치는 욕심다리에

세월 네월 간세다리

살아보니 알겠네

너나 나나 감춘 다리

 

수시로 폈다 접었다 오늘은 건너는데

 

 

 

 

놀이의 계보

 

 

할아버지 어려서 배튈락하며 놀았고

아버지는 어려서 줄넘기하며 놀았고

아들은 어른 돼서도 게임을 즐기지요

 

튈락 배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만드셨고

넘기 줄은 아버지의 어버지가 사주셨고

게임은 아들 혼자서 골라가며 사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 락이 줄을 넘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 손뼉이 쏠리다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돈이 오고 가지요

 

 

 

 

놀이의 계보 2

 

 

할머니 할아버지 어려서 좀 놀았지요

배 ᄃᆞᆼ길락 ᄍᆞᆺ기 찰락 데낄락 곱을락

이기면 책가방 들러줄락 업어줄락 먹을락

 

엄마 아빠 어려서 세련되게 놀았지요

줄다리기 제기차기 던지기 숨바꼭질

이기면 책가방 들어주기 업어주기 한턱 쏘기

 

아들딸 어려서는 장난감과 놀았지요

인형놀이 병원놀이 소꿉놀이 퍼즐 맞추기

외로움 견디는 법을 그렇게 배우는 거죠

 

 

        *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