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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의 시(2)

by 김창집1 2023. 11. 24.

 

 

삼거리 조명가게

 

 

전구 하나 주세요

마당 구석으로 돌아 들어가는 화장실

성화에 못 이겨

눈 비비며 끌려 나온 동생의 하품

네모난 창 너머의 달 조각

동그란 무릎을 닮은 밤의 말랑함을 주세요

 

스탠드 하나 주세요

시를 끄적이던 여백

쉽사리 잠들지 못하던 초록 간지럼

비밀의 범벅과 슬픔의 속눈썹이 깜박이던

새벽의 목덜미 그 은은함을 주세요

 

샹들리에를 주세요

삐걱이는 마룻바닥 위에서 흔들리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빛에 중독되어

마시고 마셔도 빛으로 빈 잔을 채워야하는

빛을 마실수록 깊게 하강하는 그림자

내가 나의 가해자가 되어버리는

가장 까만 대낮의 우울을 주세요

 

어깨까지 젖은 날이면

뛰쳐 들어가고 싶던 어둠의 소실점

이제는 켜지지 않는 삼거리에서 내가

빈 채로 끌려 다니며 문득문득 내가

까물까물 꺼져버려요

 

나를 켜주세요

꺼지지 않는 빛을 주세요

 

 

 

 

안녕, 저녁의 안녕

 

 

퇴근길 접촉사고

서성이는 발들

타인들이 달팽이관을 던진다

 

저녁 식사의 대화 y=f(x)

x, 입력 값의 안부에

오차 범위 내 y

싱거운 접촉사고가 오늘의 x

 

가슴과 눈빛 언어는 잊혀

조금 날다 추락할 뿐

서로의 좌표에 닿지 못한다

 

우리는 {}으로 만난 적이 없다

 

우주가 팽창할수록 작아지는 우리

그럼에도 죽음은 뜨거운 소실

 

좌표들은 x, y

핑퐁처럼 주고받을 뿐

 

자신의 공식을

서로의 우주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휴대폰 뉴스에서

대형사고가 깜빡인다

사뭇 활기를 띄는

좌표들의 핑퐁

 

안도의 안녕,

오늘의 안녕

 

 

 

 

아파트

  

 

밀봉된 여자가

아는 슬픔을 다듬는다

 

숨바꼭질을 잘하는 아이가

이름표 속에서 까만 틈을 배운다

 

나중에 우는 남자가

밤을 다 흘려 창백한 아침 위를

밟고 사라진다

 

죽지 않는 계단들이

끝없이 죽음을 목도한다

 

타인의 체모들이

낙엽과 섞여 뒹굴다 실종된다

 

하루들은 벌어진 상처를

가만히 드러낸다

 

마지막의 마지막

흉터는 포개지지 않는다

 

 

 

 

이제 1

    -오월, 빼앗긴 당신

 

 

언니,

우연히 언니와 마주칠 땐

하늘색 봉지 안에서 파도가 넘실거렸어

집으로 가는 긴 계단 앞에서

우리는 나란히 몽그리다

하얀 두부처럼 포로롱 뛰어올랐지

골목골목은 순백의 이방

언니와 함께라면

푸른 용기가 부풀어 올라

숨이 차도록 날아다닐 수 있었어

맞은편 담벼락 언니의 창에

노란 불빛이 켜지면

우리는 밤새 타닥타닥 모닥불 앞에 앉아

서로의 긴 머리칼을 땋으며 주문을 외웠지

나의 작은 섬에선 예언들이 춤추고

홀로 울지 않는 밤

나의 귓불은 오래도록 붉었지

 

언니,

켜지지 않는 언니의 창엔

어떤 주문이 남아 흐느끼고 있을까

창은 어둡고 골목은 그저 골목이야

나의 섬은 잠기고

영영 나는 뒷면이 되었네

언니,

여기 언니가 없어

 

 

 

 

우물의 입술을 닦는다

 

 

  병실에서 느릿느릿 깨어난 우물이 맹렬히 물을 찾는다 몇 시간 전 우물은 자기 앞의 *만큼 긴 바늘을 목구멍으로 삼켜 생살의 구멍들을 불로 메웠다 오래된 고름처럼 오염된 내가 젖은 거즈로 우물의 입술을 닦는다 마른 우물은 더욱 바싹 말라버리고 나는 우물우물 뱉을 수 없는 타진들로 표정이 마른다

 

  나의 은 스러져가는 예각 납작한 경사로 번지는 우물과의 닮음 우물은 물 하나만 생각하고 나는 우물이 살아남을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우물의 얇은 벽이 두 세계 사이를 버틴다

 

  힘겹게 부풀렸다 닫히는 틈새로 순장된 것들이 스친다 까만 밤의 아가미 발목을 삼킨 새벽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그럼에도 하얀 이가 곱던 그녀의 미소 이제는 하나의 구멍이 돼버린 우물의 기저귀를 벗기며 나는 더 오염되지 않기 위해 순장된 것들을 떠올려 붙잡는다

 

  노을이 걸린 대문 교복을 입은 소녀와 손잡고 걸어오는 그녀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 그 안에 든 따뜻하고 말랑한 것들 나는 지쳐 잠든 우물의 입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우물이 무너지면 그저 잠들 시간이 된 것처럼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아야지 차라리 우물이 무너지면 함께 웃던 장면 하나만 생각하며 휜 등을 펴야지

 

  우물이 깨자 기어 나온 내가 우물의 입술을 닦는다 부드럽고도 맹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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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 김혜연 시집 근처에 살아요(애지,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