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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3. 11. 25.

 

 

알들의 소란 - 김혜천

 

 

수면 아래 알들이 떠다닌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과

형태를 갖춘 알들이

서로를 껴안고 뒹군다

 

먹고 자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쓰고 싸우고 화해하는

일상이 분화의 터전이다

 

막막하기만 한 미지의 영역도

한순간도 떠난 적 없는 매일매일이다

 

물이 대지의 구석구석을 흐르면서

사물을 일으키듯

 

알은 몸의 각 기관을 흘러 다니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새롭게 바뀐다

 

순간에 멈추어 있지 않게 하고

권력을 저항하게 하고

고정된 이름과

모든 뻔한 것들에서 도망치게 한다

끝없이 흐르고 끝없이 변화하여

선명한 모형이 되는

그리고 또다시 떠나는

 

 

 

 

석산 나병춘

 

 

종이 운다

적막이 운다

오래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저런 피울음 본 적이 언제던가

서산 노을 황소보다 더 길게

범종이 운다

 

온갖 서러움 참았던 것들이

폭포처럼 콸콸 터져 나온다

서녘 하늘이 불콰하니

풍경이 운다

 

종이 시나브로

걸어들어간다

해으름 불타는 석산 밭으로

 

 

 

 

사랑- 정성수

 

 

사랑한다는 말은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다

 

길가에 핀 애기똥풀에게

수평선을 지키는 작은 섬에게

수수모가지에 붙은 참새들에게

허공을 질러오는 눈발에게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가도록

마음이 머무는 것마다 눈길이 가는 것마다

사랑하면 된다

 

사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다

 

세세히 바라보고 오래 잊지 않으면 모두 사랑이다

 

 

 

 

스미어 물들다 임미리

 

 

헛꽃이 빛을 잃고 돌아눕던 날

적요를 알았던 나무들

초록을 버리고 울었던 것은 아니리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이로웠기에

하찮지 않았음을

몇몇은 알았으리라

사는 동안 진한 속울음 토해냈으니

빛바랜 이파리로 남아도 이제는 괜찮다 했으리라

귀뚜라미가 밤새 조문을 하고

풀벌레들은 밤새 곡비 역할을 충실히 해냈으리라

덕분에 하늬바람이 몰려오고

이파리들은 순하여 계절에 스미어 물들 줄 알았으리라

나무들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밤이 깊도록 정성들여 염습을 했으리라

예를 갖춘 아침은 느리게 왔으나

빛이 스민 손은 물들어 가만히 내밀자

초록은 황금빛 찬란한 꽃 피워냈으리라

그렇게 산천은 가을에 스미었으리라

 

 

 

 

너울거리는 귀 - 성숙옥

 

 

나뭇잎이 날리는 가을을 걷는다

나무가 걸어온 일이

세세한 가닥으로 이어진 가지는

단풍을 페르시안 카펫 같이 펼친다

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세 사람

소니 녹음기의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으며

지난 얘기 한창이다

날이 날을 끌어당기듯

이름도 가물거리는 극장과 배우가

늑골의 골목과 골목을 돌아 나온다

치받고 너울거리는 수궁가 속

타는 애가 솟구치는데

수직으로 오르는 소리에

은행나무가 노란 나비 한 마리 날린다

주름진 이마로 소리를 따르며

가버린 날을 귀에 잇는 노인들

나무가 꾸는 꿈속의 꿈 사이

트인 귀가 너울거린다

 

 

                  * 월간 우리11월호(통권 4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