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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의 시(11)

by 김창집1 2025. 10. 26.

 

 

나무들은

 

 

산을 오르다 보면

바위도 면벽참선에 들고

나무도 철학을 하는지

고내오름 삼백 년 되었다는 노송은

온몸에 푸른 담쟁이를 두르고 서서

너 자신을 알아라!" 하는데

세상, 철모르는 늙은이' 속으로 웃었지만

어르신 말이라 잘 알겠습니다." 하였더니

-- 누런 송화를 은전처럼 내리시는데

괜히 숙연하여지기도 하고

우리 동네 터줏대감 팽나무는

그 험하다는 타클라마칸을 건너왔는지

어느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멍쿠쟁이* 도사로 눈 감고 앉아서

사람들이 들고 오는 사연들을

가타부타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는데

', 용타!'며 지전을 듬뿍듬뿍 걸어놓고 간다.

햇빛 쨍쨍한 날 오한은 뼛속을 쑤시는데

나무들은 인생무상 참회라도 하시는지

삼백육십오일 하늘로 묵묵하시다

 

---

* 멍쿠쟁이 : (제주어) 나무의 상처가 아문 자국.

 

 



거미줄

 

 

다만 기다릴 뿐

은둔자는 보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고추잠자리

사랑이 길을 잃을 때

은둔자의 고독이 출렁거렸다

 

고내봉 오르는 구비마다

생명을 겨냥한 어둠이 엎드려 있다

내 옆에 걸어가던 친구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내일은 끝내 오지 않고

삶은 파닥일수록

끈끈하게 조여 오고

 

비가 개고

거미줄마다 대롱대롱

영롱한 이슬방울들

할 말이 많은 영혼들이다

 

 



공짜에 대하여

 

 

은밀하게 건네는 것들은

포장지가 화려할수록

치명적일 때가 많다

 

세상의 모든 공짜는

음계(陰計)의 독이 묻어 있고,

 

햇빛 공기 물

날마다 거저 받는 생명을

감사하는 이는 많지 않다

 

어쩌나, 나는

공짜를 너무 좋아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

 

 



코스모스

 

 

서녘으로 설핏한 햇살

담벼락에 따스하다

커피가 식어가는 창가에

가을이 서운히 깊어간다

 

새파란 하늘에 눈물이 고이고

억새 하얀 들판을 쓸어간다

전봇줄에 몸을 비비는 제비 가족

마지막 기항지의 밤은 설레고

먼지 풀썩이는 길가에

코스모스 몇 낱이 하늘거린다

 

한 장 남은 달력이 허전하다

누렇게 빛바랜 가족사진 속에

지워지지 않는 시간이 깜빡인다

오랜 상처를 만지듯 바라보는

끝물 코스모스 같은 사랑이 있다

 

 



가다가 문득

 

 

가다가 문득

돌아보면

어린 날의 방울새가

뒤꼍 감나무에서 노래하고

 

저만치 쓸쓸한 거리에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오고

까무잡잡한 동그란 소녀

첫 키스를 돌려달라며

하얗게 웃고 있다

 

그리운 날 아련히

초가집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나보다 젊은 어머니

긴 골목 어귀에 나와서

머리 허연 아들을 기다리신다

 

가다가 문득

휑한 바람이 부는 날

거울 앞에 서면 더욱 서러워

여린 마누라 차마 오셨는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신다

 

오늘도 덩그러니

마음 붙일 곳 없는 허공에

덤으로 내리신 하루

그 더욱 쪼개어서

한 보름치로 살아라 하신다.

 

 

                     *김종호 시집 강나루의 대화(푸른생각,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