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백의 꿈
이른 봄날
4•3평화공원에 각명비를 보고 돌아가는데
동백꽃이 지고 있다
아직은 날카로운 겨울 칼날
댕강댕강 잘려 떨어지는 꽃들
산을 닮은 꽃술
섬을 닮은 꽃잎
부서지지 않고 떨어지는 꽃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섬 너머로 날아갔으면 했다
남해를 넘어 날아가다가
여수바다 앞에 떠다녔으면
금남로 망월동에 불그스레 불렸으면
지리산 둘레 길마다 꽃길로 깔렸으면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올라
금강산 자락에 꽃잎이 날렸으면
산에서 피어오른 구름을 타고
태평양 넘어 미얀마에도
꽃비가 내렸으면 했다
꽃이 지고 열매가 주렁 주렁 달리는 날
여문 열매 속에는
씨앗들이 자라는 꿈을 꾸겠지
자라난 씨앗들이 발아하는 날
튼튼한 나무로 커 기는 꿈을 꾸겠지
나무로 자란 동백이 꽃을 피우는 날
섬에 가득한 동백꽃들이
산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가는 날
동백꽃들로 넘치는 세상
꿈꾸며 꽃길을 걷는다

♧ 손가락총
신전마을* 길을 걷는데
작은 아이가 손가락으로 큰 아이를 가리킨다
작은 아이 입에 빵 소리가 나면
큰아이 입에 악 소리가 난다
아이를 보살핀 죄
손가락총을 맞고 말았다
밥을준죄
잠자리를 준 죄
홍시를 준 죄
손가락총을 맞아 죽었대
추석 이튿날 마을을 휩쓴 화마
명절밥이 제삿밥이 되었대
손가락에 사람이 죽을 줄
험악한 군인들의 재촉에
손가락을 들었던 소년은 몰랐겠지
불타버린 마을을 다시 일으킨 주민들
외지인을 향한 눈총들
경계의 총알이 날아온다
마을을 나서는데 작은 아이가
입구를 지키는 노거수를 향해
손가락총으로 빵 쏜다
노거수 가지가 휘청거린다
후드득 잎들이 핏줄기처럼 쏟아진다
---
*전남 순천 낙안면 소재 여순사건 피해 마을. 아이의 손가락질에 주민들의
학살당했다.

♧ 골령골 사람들
흙을 닮은 시간의 껍질을 벗긴다
녹슨 탄피와 유골이 섞인
골짜기 깊은 자리
곶자왈에서 만성리에서 골령골로
제주와 여순과 대전은
골짜기로 이어진다
제주사람 여순사람 대전사람
고향은 달라도
마지막 머무른 곳은 한 군데
한 집에 머무르다가
한날한시에 한자리에
묻힌 사람들
차가운 탄피와 함께
길고 깊은 시간의 껍질 속에
묻혀 지내온 날들
서로의 육신과 탄피가 엉켜
죽어서도 살이 녹아 없어져도
낳고 자란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속에서
오늘도 돌아갈 날을
살 없이 기다리는 사람들
밝은 세상 위로
두 손 모아 정성스레 모셔 올린다

♧ 흑백사진
흑백의 세상에 쓰러진 남자는
색깔을 가지고 있다
흐트러지고 더러워진 옷
고무신마저 벗겨진 채
가슴에 붉은 꽃을 피운 그는
차갑게 식은 채 누워 있다
장포와 끈을 챙겨온 여인은
그를 바로 누이고
가지런히 매듭을 짓는다
혈화 가득 피어 비린내 나는
험악한 흑백의 장면 속
아이들은 살아남아 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거보다
더 슬픈 건 살아남아야 하는 거
붉게 물들어 떠나는 지아비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헤아려본다
홀로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날들
남도 말라 모질게 살아가야 할 날들
거친 사상의 바다
풍랑에 떠다니는 돛단배처럼
휩쓸려 떠다녀야 할 날들
가라앉지 않으려 독한 마음으로
맨땅에 누운 지아비
어설프게 소렴한다
떠나는 길 서럽지 않게
고무신 신기고
붉게 입혀진 색을 장포로 덮는다
흑백의 장면들을 보는 나는
마이던스*의 눈으로
눈물을 닦는다
---
*칼 마이던스. 여순 학살 현장을 촬영한 종군 사진기자.

♧ 흑백 사진 속 아이들
옹기종기 모여 바라보는 눈
순수한 결정체인 아이들의 눈
눈 덮인 산속에서
가느다란 햇살에 반사되어
유난히 반짝인다
헤진 갈중이를 입은 아이들
바라보는 눈 속 어디에도
좌우는 없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 아이들은
체념의 그늘이 드리워진 채
뒷줄에 모여 앉은 여인들은
붉은 눈이 쌓이는 오름
눈물이 고인 곶자왈
침묵이 머무는 궤
남자들이 있던 자리
어느 구석에도
남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맑은 눈의 아이들만 남아
오래된 사진처럼
주름진 채로 살아왔겠지
*오광식 시집 『귓속의 이야기』 (도서출판 북인,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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