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포토 에세이] 산남 정류장에서 – 현택훈
서귀포 동문로타리 버스정류장에서 한라산을 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차까지는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버스 시간표를 보는데 안내 노선표가 삐뚤빼뚤하다. 마치 저 산을 넘어가기 위한 길처럼. 너는 창가에 앉아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쏠린 채 산을 넘을 것이다. 사평역에서는 그믐처럼 조는 사람도 있는데, 저녁에 한라산을 넘는 버스에서도 사람들은 대개 선잠에 들 것이다. 너는 리시버를 귀에 꽃은 채 라디오를 들으며 노루가 나올 것만 같은 산의 어둠을 차창 너머로 응시할 것이다. 너의 하루도 뜯겨진, 색 바랜, 기울어진 노선표 같아 십여 분 뒤 도착할 버스를 괜스레 초조하게 기다렸다. 너는 마침내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갈 것이다. 가다가 막내 생각이 나서 무인 아이스크림가게에 들러 죠스바를 살 것이다. 길은 언제나 구곡간장이고, 정류장 불빛에 의지하며 살아왔다. 버스가 오는 길 정도의 각도만큼만 목이 돌아간다. 내일도 너는 281번 버스를 탈 것이다. 때론 꿈속에서도 버스를 타고 먼 시간으로 간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내리지 못하는 발들이 보이다가 나중에는 그 발 무리에 섞여 서성일 것이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내리지 못하는 승객이 될 것이다. 세상 모든 버스 노선은 수만 리 먼 길이다.

♧ [특집] 광복 80년, 해방 전후 제주문학을 읽다
제주문학을 이야기하면 흔히 1950년대 이후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제주의 현실과 정서를 문학작품으로 담아내려 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문예지와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창작의 꿈을 놓지 않았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번 호에서는 해방 전후의 제주문학에 대한 기획을 마련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문학활동을 이어간 제주작가들의 작품 세계, 해방 직후 발간된 제주 최초의 종합 잡지 『신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또한 해방기 제주를 배경으로 한 이영복의 ‘야로’와 오의진의 ‘긍지’ 두 작품의 전문을 실었다.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해방 전후 제주문학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 2024헌나8 – 강덕환
초마가라
계엄령으로
들러먹젠
놉드는 걸
백성들이
막아산
웨울렀주
어시대겨불라
경헴시난
재판관덜
팔대 빵으로
앗아부런
제나잘관다리여

♧ 감나무밭에 바람이 불어오면 – 강동완
감나무밭은 엄마의 따뜻한 눈물이 매달려 있다 아빠와 싸운 날이면 엄마는 감나 밭에 들어갔다 햇살을 끌어안고 기도를 했다 잠자리가 나뭇잎에 앉아있다가 살짝 날아 올랐다 환한 빛들이 나뭇잎에 차곡차곡 쌓였다 빛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 나뭇잎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나뭇잎에 코를 대고 깊은 숨을 쉬었다
엄마는 이상하고 매일 지루했고 뚱뚱했다
늙은 사람들은 눈물을 홀리며 감나무 밑에서 발톱을 깎았다
나는 자라지 않던 하얀 수염이 자라나기도 했다
엄마는 감나무 밑에 죽은 동생을 묻었다
엄마는 동생의 기일을 자주 잊었다
나는 감나무 밑에서 시를 썼다 시들도 감나무 밑에 묻었다
이 감나무밭에 잠시 머물던 겨울이 죽어 나갔다
바람이 불어오면 나뭇잎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감나무밭에서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술래잡기를 했다 어떤 아이는 감을 따 먹고 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아이는 매일 술래가 됐다 내 몸에 붙어 있는 잠들은 맨홀 같아서 깊고 아득했다 나는 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쉽게 감나무밭에서 길을 잃었다 나오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덤불 속에 갇혀 울고 있었다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감나무를 꼭 끌어안고 안개를 밀쳐냈다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엄마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영원히 나올 수 있었다
빗방울이 감나무밭에 내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비를 맞으며 감나무밭에서 수많은 나를 낳았다
나는 감나무 가지에 입을 물고 둥그렇게 매달려 있었다
감나무밭에서 우우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소리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 잘못 없는 꿈 – 고영숙
오래오래 참으면 나도 눈부셔질까요
잠깐씩 깨어나
베개에 묻은 흙을 털면
나의 바당색은 남향이었을까요
꽃나무 아래에서 죽은 인형은
차가운 밤이 되고
우린 매일 좋은 꿈을 나눠먹어요
실패한 꿈은 세상에 없는 기원이 되고
반려식물처럼 길어지는 머리카락
아직 꿈에 봉인 된 인형은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선몽이라고
아무 잘못 없는 꿈이라고
나에게 말하지만
식어가는 잠은 말수가 적어요
국화꽃을 던지면 말린 꿈은
생생한 잎맥이 돋아나요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하면
깊은 잠을 못 잔다고
남은 꿈을 심는 뿌리 없는 사람들
*계간 『제주작가』 2025 가을호(통권 제9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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