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겨울 장미
배신이라도 한 번 때려봐라
귀싸대기 갈기는 설한풍에
쓰러져 잠든 척이라도 하지
일편단심 곧추서서
누구를 기다리길래
이 소이
겹겹이 뜬 붉은 눈

♧ 별꽃
그제 봤는데도 안 만난 척
어제 봤는데도 못 만난 척
꿈인 듯 그리움인 듯
밤하늘 별꽃
날 기다린 듯 오늘도 새로 피네
저 멀리 떠난 사람인 듯
내 안에 사는 사람인 듯

♧ 새벽, 신사수마을에서
바람이 빗겨주는 머리카락으로
갈 때를 예감하는 갯억새 쓸쓸하다
스산한 늦가을
나처럼 서쪽으로만 가야 하는
외롭게 늙은 달빛도 정처 없다
다시 새벽, 신사수마을 갯가
하루를 들어 올리는 하늘은 끙끙대고
긴 밤 지새운 갈매기 한 쌍
파도에 올라 행복을 저울이는데
낙엽으로 도두봉 기슭을 낙하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세월
이쯤까지 살아온 업보가
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꺼내더니
갯바위를 치오르는 물결 속으로
무리지어 장렬히 산화한다
나도 나비처럼 날 수 있겠지
기어이 당도해야 할 저 먼 산기슭
이 바다를 품고 그리움들을 품고
바람 따라 하늘하늘 가야 하겠지

♧ 강
제주를 달리다 보면
흐르는 강물을 탄 듯하네
제주에서는 강*에 가야 일을 보네
강에 가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네
마트 강 둠비 상 오라
한라산 강 등산이나 허주
가는 곳마다 다 강이네
바당 강 구젱기 심영 오가
학교 강 공부나 허게
육지서 온 사람들이 말하네
제주는 강이 많아 청정하군요

♧ 가을을 신는 신발
신발장 속에서 귀뚜라미
낭랑한 소리로 세상을 읽는다
몸이 태워지며
마지막 능선을 치닫던
버거운 여름도 이제 산만해졌다
작은 우주 내 방 천장에
마냥 풀어놓은
오만가지 관념의 새끼들이
앞다투며 외출을 종용한다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들이 준비를 마친 가을 하나
슬며시 신발장을 열었다
언제나 출발을 기다리는 신발들
가을을 반기는 눈빛이 초롱하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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