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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의 시(4)

by 김창집1 2025. 11. 4.

 

 

 

♧ 겨울 장미

 

 

배신이라도 한 번 때려봐라

 

귀싸대기 갈기는 설한풍에

쓰러져 잠든 척이라도 하지

 

일편단심 곧추서서

 

누구를 기다리길래

이 소이

겹겹이 뜬 붉은 눈

 

 



♧ 별꽃

 

 

그제 봤는데도 안 만난 척

어제 봤는데도 못 만난 척

꿈인 듯 그리움인 듯

밤하늘 별꽃

날 기다린 듯 오늘도 새로 피네

저 멀리 떠난 사람인 듯

내 안에 사는 사람인 듯

 

 



♧ 새벽, 신사수마을에서

 

 

바람이 빗겨주는 머리카락으로

갈 때를 예감하는 갯억새 쓸쓸하다

스산한 늦가을

나처럼 서쪽으로만 가야 하는

외롭게 늙은 달빛도 정처 없다

 

다시 새벽, 신사수마을 갯가

하루를 들어 올리는 하늘은 끙끙대고

긴 밤 지새운 갈매기 한 쌍

파도에 올라 행복을 저울이는데

낙엽으로 도두봉 기슭을 낙하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세월

 

이쯤까지 살아온 업보가

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꺼내더니

갯바위를 치오르는 물결 속으로

무리지어 장렬히 산화한다

 

나도 나비처럼 날 수 있겠지

기어이 당도해야 할 저 먼 산기슭

이 바다를 품고 그리움들을 품고

바람 따라 하늘하늘 가야 하겠지

 

 



♧ 강

 

 

제주를 달리다 보면

흐르는 강물을 탄 듯하네

 

제주에서는 강*에 가야 일을 보네

강에 가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네

 

마트 강 둠비 상 오라

한라산 강 등산이나 허주

가는 곳마다 다 강이네

바당 강 구젱기 심영 오가

학교 강 공부나 허게

 

육지서 온 사람들이 말하네

제주는 강이 많아 청정하군요

 

 

 

♧ 가을을 신는 신발

 

 

신발장 속에서 귀뚜라미

낭랑한 소리로 세상을 읽는다

 

몸이 태워지며

마지막 능선을 치닫던

버거운 여름도 이제 산만해졌다

 

작은 우주 내 방 천장에

마냥 풀어놓은

오만가지 관념의 새끼들이

앞다투며 외출을 종용한다

 

주섬주섬 차려입고

나들이 준비를 마친 가을 하나

슬며시 신발장을 열었다

언제나 출발을 기다리는 신발들

가을을 반기는 눈빛이 초롱하다

 

 

                  *양전형 시집 『나 다시 필 거야』 (한그루, 2025)에서